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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호 2019년 9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독불 관계 개선으로 유럽통합·독일통일, 한일 관계 개선이 동북아 질서 영향”

신각수 전 주일대사·법무법인 세종 고문

동문을 찾아서



“독불 관계 개선으로 유럽통합·독일통일, 한일 관계 개선이 동북아 질서 영향”


신각수  전 주일대사·법무법인 세종 고문



신각수(법학73-77) 전 주일대사는 현역에서 물러난 지 7년이 지났지만 현역 때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근 한일관계가 악화하면서 그를 찾는 사람이 많다. 모교에서 국제법 박사 학위를 받은 외교관으로 국제정세에 혜안을 갖고 있다는 평가다. 역시 모교에서 국사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조선일보에서 오랫동안 학술 분야를 담당한 이선민(국사80-84) 본지 논설위원이 9월 3일 광화문 디타워 법무법인 세종 사무실에서 신각수 동문을 만났다. 이선민 위원은 최근 주간조선에 원고 100매 분량의 ‘반일 종족주의’ 비평을 게재할 정도로 이 분야에 관심이 높다. 한일 간 현안을 넘어 근원적 문제까지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갔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2013년 36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마무리한 뒤 민간인 생활 7년차에 접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외교 관련한 강연, 세미나, 회의 등에 자주 불러주셔서 바쁘게 지냅니다. NGO 활동도 15개 정도 관여하고요.”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습니다. 진단을 해주신다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54년이 흘렀습니다. 그 과정에 7~8회 정도의 위기가 있었습니다만 지금같이 7년 동안 계속된 상황은 전례가 없습니다. 굉장히 장기간이고 원인이 복합적이며 나타나는 단층이 여러 개입니다. 복합다중골절 상태라고 봅니다. 종전에는 과거사 위주였다면 지금은 영토, 국민감정, 경제, 안보 문제까지 확대되는 상황입니다.


배경을 보면 한일 양국의 사회가 변했다는 것, 즉 세대교체가 됐고 양국 간 격차가 줄었다는 점이 있지요. 물가를 고려한 1인당 소득은 거의 같아졌고,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은 오히려 일본 기업을 추월했거나 따라잡는 수준에 왔죠. 또 한일 간 법과 정의에 대한 인식차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법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반면, 한국은 20세기 굴절의 역사에 권위주의 체제를 거치고 민주화 돼 가는 과정에서 정의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식이 강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진보적인 한국 정부와 보수적인 일본 정부의 차이가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 동안 경제가 망가지는 가운데 아베 정권 이전 7년간 총리가 7명 바뀌었습니다. 정치적 불안이 컸죠. 또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이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 사고들이 강한 일본을 희구하게 했고 전전(戰前) 역사를 미화하는 역사 수정주의로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복잡한 상황을 잘 정리해야 할 양국의 정치권은 소통은 안 하고 포퓰리즘에 맞추어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소셜미디어가 문제를 확대 증폭하고 있습니다.”


-공로명 전 장관이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한일협정 당시에는 개인청구권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나중에 개인도 청구할 수 있다는 이론이 소개됐지요. 이번 대법원 판결은 개인청구권을 인정하는 전제에서 나온 건데, 사후에 제기된 개인청구권 개념으로 1965년 협정을 무력화시키는 게 타당한지 모르겠어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청구하면 개인에게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경제개발에 목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괄타결(lump- sum settlement)로 하자고 했지요. 그걸로 티격태격하다 결국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로 결정되었죠. 경위를 보면 강제징용은 한일협정의 범위 안에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해요. 그래서 우리 정부가 1975년과 2007년에 각각 94억원, 6,184억원을 개인에게 보상해줬지요. 이는 일괄보상으로 받은 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개인에게 보상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죠.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나 2018년까지는 해결됐다는 입장이었어요. 끝나지 않았다면 우리 정부가 추가로 해주면 되고요.


“1965년 체제 한일 협의해서 보완할 수 있어”

과거사 현안과 역사 화해 분리해서 접근 바람직

日, 도서국가 기질 강해 1인당 해외여행자수 한국 1/4 


그런데 대법원 판결이 나와서 어려워졌습니다. 올 1월부터 일본 정부와 자민당이 계속 경고를 보내는 사이 현 정부는 대법원 판결 존중만을 주장했어요. ‘일본 기업의 한국내 압류재산을 현금화하면 우리는 대항조치를 할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금융, 무역, 관세, 비자, 송금 등을 열거했지요.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정부는 뒤늦게 너무 미약한 해결방안을 제시해 시기를 농친 셈이지요.”


-1965년 한일협정을 보완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영구불변은 없습니다. 1965년 체제도 당사자끼리 얼마든지 개정하거나 추가 합의해 보완해 나갈 수 있어요. 실제로 그렇게 해 왔고요. 한일기본조약에 부속된 4개의 협정 가운데 어업협정은 1997년 새로운 체제로 바꿨고, 문화재 반환 협정은 2010년 일본 궁내청 보관 한국 도서가 돌아올 때 ‘도서에 관한 양국 간 협정’이 더해져 합쳐졌죠. 재일한국인 3세의 법적지위에 관한 것은 교환각서로 해결했고, 사할린 한인 이주 문제도 한국과 일본이 협력해 해결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보완해 왔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합의에 의해 보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에도 막부 말에 서구 열강들과 체결했던 불평등조약을 개정해낸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외무성은 조약국이 셉니다. 그런 역사가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면 협의해서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식민지배와 징용, 위안부 문제에 대해 불법성 여부를 놓고 한일 간에 좁힐 수 없는 인식 차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한국은 식민지배가 ‘불법 부당하다’는 입장이었고 일본은 ‘합법 정당했다’는 입장이었어요. 1980년대 초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터졌고 중반에 후지오 망언이 나오자 나카소네 총리가 그를 해임했어요. 그리고 1983년 전두환 대통령,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에 가면서 천황의 사과 발언이 나왔죠. 결정적으로는 1993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가 나왔고요. 이 일련의 과정은 일본이 ‘합법 정당’에서 ‘합법 부당’으로 가는 과정이었어요. 이제 양국은 일제의 식민지배 등이 부당했다는 점은 인식이 일치하지만 아직도 불법 여부에 관해서는 여전히 간극이 있죠. 불법성을 인정받기 위해 몰두하면 언젠가 성취될지도 모르겠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위해 한일 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거는 것은 좀 무모하다고 봐요.”


-요즘 보면 그 부당이란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부당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본의 우익들은 아직도 정당했다고 생각하겠죠. 일반적으로 보면 전전 세대의 경우 식민지배를 통해 한국인에게 아픔을 줬다는 인식은 있었어요. 그것을 하나의 일본이라는 국가 단위로 결합하는 집단주의 속성 때문에 표현하기 어려웠던 거죠. 한일 간의 격차가 컸고 한국의 대일의존도가 높은 힘의 비대칭성도 작용했고.

독일이 과거사 반성을 잘하는 이유는 독일인들의 내적 역량도 있지만 외적인 압력도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태인들이 미국 사회를 통해 압력을 가하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독일도 과거 식민지배 경험이 있습니다만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는 없었어요. 나미비아에서 집단살해에 대해 100년 이상이 지나 유감을 표명한 정도였지요. 이처럼 과거사 반성에도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합니다.


우리도 한일관계에서 좀 더 실용적인 접근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과거사 현안들과 근본적인 역사 화해를 분리해서 전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이른 시일에 마무리 짓고 후자는 긴 안목으로 대응하는 거죠. 아베 정권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일이 대응해서 한일 관계 전반을 흩트려 버리는 것은 상책이 아닌 것 같아요. 한일관계를 안정화하는 가운데 일본인들에게 과거사를 알게 해서 자연스럽게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갖도록 해야지요.” 


그는 이 대목에서 양국 젊은이들의 인적-문화 교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전후 세대는 전전 시대를 잘 모릅니다. 우리와 다르게 역사교과서에서 한국에 대한 기술이 적고 식민통치에 관해서는 더 적어요.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 한일 양국 사이에 비대칭성이 현저합니다. 인적교류 등을 통해 20세기 전반에 한일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줘야 합니다. 한일 못지않게 사이가 나빴던 독일과 프랑스는 1963년 엘리제 조약이 체결된 후 대규모의 인적교류가 이어졌고 그게 결국 독일 통일을 이끌고 유럽통합에도 기여했습니다. 한일관계의 안정이 동북아 질서 향방에도 큰 영향을 줄 겁니다.”


-이번 한일 갈등은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쌍무적인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매우 중요한 변수로 개입돼 있지요. 또 북한도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 있고요. 우리 정부가 실용적인 접근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결정을 미국이 심각하게 여기는 이유는 미중 간에 본격적인 패권경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죠. 미국이 중국과의 패권경쟁에 임하는 기본틀이 한미일 안보협력체제와 인도태평양 전략이거든요. 이 중 하나를 한국이 흔드는 것에 반발하는 것이죠. 

한국 정부가 거기에 따르는 대가와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결정이 옳았는지는 국민이 판단할 문제겠죠. 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국가 목표와 국익을 정의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이에 따라 국가전략을 세워서 그 전략을 수행할 전술적 수단을 전체적으로 관리해 나가는 것인데 첫 부분부터 흔들거리는 게 아닌가 싶어요.”


대담 : 이선민(국사80-84) 조선일보 선임기자, 본지 논설위원(사진 오른쪽)



-일본에서는 얼마나 근무하셨어요?

“대사 2년, 그 전에 5년 근무했습니다.”


-7년이면 짧지 않은 기간인데 일본은 어떤 나라입니까.

“기본적으로 섬나라 특성이 있지요. 일본인은 자기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데 일본 열도에서 끝나요. 동심원이 동북아, 동아시아, 세계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굉장히 틀이 꽉 짜인 사회고요. 이런 사회는 집단주의가 뿌리내리기 쉽습니다. 봉건주의 전통이 있어서 지방이 상당히 발달했습니다. 이것은 부러운 점이죠. 그리고 일본은 실용주의 전통이 강합니다. 상거래 문화가 오래됐고 공예 문화도 그렇죠. 메이지 유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에도 막부 시대에 토양이 마련됐고 서세동점의 동력을 받아 메이지유신으로 연결된 거죠. 또 호기심이 강하고 끈질긴 민족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조업의 극치를 달리는 게 가능한 것 같고요.”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동아시아에 있지만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나 조공책봉 체제에서 벗어난 나라였죠. 자기 나름으로 별도의 천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열도를 벗어나 동북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가능한가라는 의문도 듭니다. 

“일본인은 코스모폴리탄 기질이 약해요. 해외여행 비율은 인구대비 한국의 4분의 1밖에 안 됩니다. 저는 일본 사회가 좀 더 열린 사회가 돼야 한다고 자주 이야기해요. 일본 사회는 고령화의 그림자가 짙고 20년 동안 디플레이션을 경험하면서 더 위축되고 소극적이고 안주하는 사회가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의 세대들은 전전의 경험이 없다는 게  긍정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일본의 전후세대는 있는 것을 그대로 보려는 경향이 강해요. 국적에 관계없이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싫은 거죠. 한일 양국 20~30대 젊은이들의 상호 호감도는 이전 세대보다 20~30% 높습니다. 긍정적입니다. 계속해서 증대시켜 나가야죠.”


정리=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