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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호 2019년 4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인터뷰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출발입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출발입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며칠 앞둔 지난 4월 4일 김자동(법학49입)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을 만났다. 김자동 회장은 1928년 상하이 임시정부(이하 임정) 청사 인근 아이런리에서 독립운동가인 부친 김의한 선생과 모친 정정화 여사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 구, 이동녕, 이시영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품에서 임정과 함께 자랐다. 임정의 산 증인이다. 일반인들에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한수인의 ‘모택동 전기’(전4권),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등의 번역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울 광화문 로얄빌딩 6층 임정기념사업회 집무실에서 만난 김 동문은 91세에도 잡티 없이 맑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치아도 고르고 건강해 보이세요.
“귀가 어둡고 다리가 불편하지만 다른 곳은 문제없어요. 이도 부모님께 받은 그대로입니다. 음식 잘 먹고 규칙적인 생활이 건강에 좋습니다. 여기 사무실에 매일 출근합니다.” 

-책상에 영어 신문이 많아요.
“뉴욕타임즈, 아주경제 중국어판 등 매일 해외 신문을 정독합니다. 읽고 나면 뭘 읽었나 기억이 안 나서 문제지 습관처럼 보고 있어요.(웃음)”

-중국어는 상해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사셨으니까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영어는 언제 익히셨지요.
“법대 입학 할 때만 해도 잘하지는 못했어요. 6·25 전쟁 이후 학교 다니는 게 무의미해져 일자리를 구했는데 첫 직장이 미군에서 통역하는 일이었습니다. 법대 선배이면서 먼 친척 되는 김숙동(법학48입) 형이 영어를 곧잘 했는데 저를 소개해줬어요. 덜컥 겁도 났지만 운 좋게 영어가 덜 쓰이는 도서관 사서를 맡아 어렵지 않게 했습니다. 또래 미군들과 어울리면서 조금씩 늘었고 부산 피난 시절부터 정식 통역 일을 했습니다. 미 정보 부대에서 한국 신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죠. 4년 하다 보니 자유롭게 영어가 되더군요.”

-대학 졸업에 대한 미련은 없었나요.
“법학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사실 입학할 때도 지리, 역사, 정치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주변의 권유로 들어갔죠. 민법 점수가 좋지 않았습니다. 교양학부 국어 김기림, 철학 손정현, 경제학 최오진 교수 등의 수업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전과를 고민하는 와중에 전쟁이 터지면서 학교를 그만뒀죠.”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번역은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법대를 2학년 때 그만두고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어디 한 곳에 매여 있는 걸 싫어했습니다. 조선일보 공채 1기(8명 선발)로 들어가 외신부에서 기자 생활을 했죠. 당시 1기 전원이 서울대 출신이었죠. 문리대 6명, 상대 1명, 법대 1명. 이정석 씨가 입사 동기였습니다. 저는 졸업생은 아니었지만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해 합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4년 다니다 그만두고 베트남에서 무역일도 하고 어린이 신문, 민족일보 기자 생활도 했죠. 두 신문사가 모두 폐간됐습니다. 실직자로 있을 때 출판사(일월서각)를 하는 김승균 씨를 만나 번역 일을 하게 됐죠. 이 분이 성균관대 운동권 출신인데 주로 그쪽 계열의 책을 발행했습니다. ‘한국전쟁의 기원’, ‘모택동 전기(전4권)’, ‘레닌의 회상’, ‘고요한 돈강’ 등 모두 그런 인연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적잖이 공부가 됐습니다. 기존 한국전쟁의 연구는 남침설과 북침설이 맞서며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 외인론을 강조하는 분위기였죠. 커밍스 역시 한국전쟁의 원인을 강대국의 이념 대립 가운데 미국과 소련의 책임이 크다고 봐요.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 민족 내부의 사회적 역사적 모순을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합니다.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 책은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뒤흔들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얼마 전 한국에 오셨죠? 
“국제학술포럼에 초청돼 같이 점심을 먹었어요. 첫 대면이었죠. ‘한국전쟁의 기원’ 번역자로 누가 소개했더니 아주 기뻐했어요. 영어는 어디서 배웠냐며 실력이 좋다고 추켜세우더군요.”

-‘모택동 전기’는 꽤 긴데 혼자 번역하신건가요?
“공동 번역이었는데, 이름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 제 이름만 번역자로 기록됐어요.‘모택동 전기’는 마오쩌둥만 다 잘했다는 식으로 써서 조금 거슬렸던 기억이 납니다, 크루프스키야의 ‘레닌의 회상’은 짤막한 책이지만 양심적으로 써서 참 좋았고요.”

-당시 그런 책들이 모두 금서였죠.
“그랬죠. 이들 책에 앞서 미국의 스티브 샤건이 쓴 ‘π=10.26 회귀’(나중에 ‘죽인 자는 죽는다’라는 제목으로 재출간) 소설을 번역했는데 이 책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이어지는 전두환 장군의 등장 등 한국 상황을 소설로 쓴 내용입니다. 전두환 정권 때 출판사 사장, 편집장, 저 모두 연행됐어요.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는데 15일 살다 왔습니다. 제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감옥살이였죠.” 

김 동문은 200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 처음에는 조부와 부친, 모친의 기념사업회를 하려 했지만 임정에서 활동한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기념사업회로 만들었다. 임정기념사업회는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던 모든 독립운동가를 기념하고 조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일이 다가옵니다.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역사가들은 지금의 시대를 한반도 대전환기라고 하죠.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임정은 해외 망명정부였지만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남북의 통합과 평화는 임정의 오랜 꿈입니다. 평화의 바람이 잠시 멈췄지만 현 정부와 미, 북이 평화의 열매를 맺을 거라 믿습니다. 앞으로 100년의 첫 출발은 그 꿈의 실현이 돼야 합니다.” 

상하이에서 출생 
임시정부 품안에서 자라

‘한국전쟁의 기원’,
‘모택동 전기’ 등 번역

조부·부친·모친 모두 
독립운동가 집안 

-어린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상하이 우리 집 대각선에 임정 청사가 있었어요. 임정 2층 사무실을 백범 김 구 선생님이 쓰셨는데 우리 집이 가깝고 어머니가 늘 환대해주시니까 점심 때 자주 오셨어요.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저를 데리고 산책을 하곤 했죠. 백범 선생이 어떤 사람에게도 따스하고 친절히 대하는 성품이었죠. 백범 선생이 처음 임시정부에 왔을 때 생김새가 공부를 한 사람 같지 않다는 이유로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금세 선생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차렸죠. 임정이 상하이를 떠나 자싱(嘉興)으로 갔을 때 우리집도 옮겼어요. 그곳에서 아이들과 놀던 기억이 납니다. 1990년대 초 자싱에 다시 가서 봤더니 일대가 도시계획으로 딴판이 됐더군요. 그래도 우리가 살던 집은 그대로였어요. 1층에 이동녕 선생, 2층에 엄항섭 선생 가족이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자싱시 정부에서 각 방에 누가 살았는지 확인해달라고 해서 알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도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와 윤봉길 선생의 고향이 예산이었어요. 임정 청사에 청년들이 많이 있었는데 윤봉길 선생이 우리집에 자주 들렀답니다. 당시 윤봉길 선생도 고국에 나와 동갑인 아들이 있어서 저를 아주 이뻐해 주셨고요. 이봉창 의사의 거사가 미수로 돌아간 원인이 폭탄 문제였기 때문에 폭탄 제조에 심혈을 기울였고 동일한 무게의 돌로 던지기 연습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 거사가 성공할 수 있었지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서대문에 기념관 건립 사업을 진행하고 있죠.
“참으로 다행입니다. 2021년 완공을 목표로 곧 착공 선포식을 열 것 같습니다. 이종찬 위원장이 맡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완공될 때까지 살아서 그 모습을 봤으면 좋겠네요.”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 선생의 유해를 아직 모셔오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상하이 송경령능원 한 모퉁이에 묻혀 있어요.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해 유해를 옮겨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지하 독립운동 조직 대동단의 총재였고 74살에 망명해 임시정부의 고문을 지냈죠. 그런 할아버지의 서훈이 보류된 이유는 충청감찰사로 재직할 때 관군을 동원해 의병장 민종식을 체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매천야록’인데 매천 황 현은 물론 애국지사이지만 보수적인 분으로 개혁파인 할아버지에 대해 비판적이었어요. 민족문제연구소에 조사를 부탁해 전해들은 말은 당시 일본 주차군사령부의 보고를 보면 민종식 의병장은 일본군이 체포했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는 겁니다. 재심이 이뤄지고 있고 곧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 기대합니다.”

-건국일 논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정 수립일이 건국일이라고 봅니다. ‘건국절’이라는 말이 있지도 않았는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새삼 단독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건국절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임정 수립일을 4월 11일로 하든 13일로 하든 중요하지 않아요. 11일은 의정원이 첫 모임을 가진 날이고, 13일은 의정원 결성 후 첫 내각이 구성된 날이니 두 날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국민이 대한의 주인이며, 대한인은 자주민이라는 선언. 이것은 주권재민 정신이며 독립정신입니다. 이렇게 지난 백년을 기억하며 새로운 백년을 열어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김남주 기자 


김자동 동문은

1928년 상하이에서 출생, 상하이, 자싱,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으로 이어진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를 따라 성장했고, 마지막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1949년 모교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953년 조선일보 공채 1기로 입사해 외신부에서 일했으며, 1961년 민족일보 기자를 지냈다. 2004년 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발족하면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회고록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2014),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2018)을 펴냈고,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저)’, ‘레닌의 회상(크루프스카야 저)’, ‘모택동 전기(한수인 저)’ 등을 번역했다.

지하 독립운동 조직 대동단의 총재와 임시정부의 고문을 지낸 동농 김가진 선생이 조부이며 부친 김의한, 모친 정정화 선생도 각각 독립장과 애족장을 서훈 받았다. 부인 김숙정 여사와 사이에 김선현 오토인더스트리 대표 등 2남 2녀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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