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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호 2018년 4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김재실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장 인터뷰

“오렌지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도 나라 위한 일”
김재실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장

“오렌지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도 나라 위한 일”

김재실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장이 안창호 선생의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한 청년이 있었다. 1963년 3월 10일 광화문 거리를 걷던 그는 우연히 도산 안창호 서거 25주기 추모식장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접한 ‘참배나무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엔 돌배가 열린다’는 도산의 말. ‘만고의 진리구나’ 청년은 마음을 사로잡혔다. 곧바로 도산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활동에 뛰어들어 도산의 정신을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50여 년 뒤엔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됐다. 김재실(수학63-68) 동문 이야기다.

앞서 신익희 선생, 강영훈 전 국무총리 등 덕망 높은 이들이 사업회를 이끌었다. 부담감 속에서도 김 동문은 지난 3월 10일 국가보훈처장과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도산의 순국 80주기 추모식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3월 28일 신사동 도산공원에 있는 도산기념관에서 그를 만났다.

“문리대 1학년 때 흥사단 활동을 시작해서 이사원과 공의회장을 지냈어요. 대학생 땐 안병욱 전 숭실대 교수님과 순회강연을 돌면서 전국에 아카데미 백여 개를 조직했죠. 흥사단 소식지 ‘기러기’ 편집도 도맡았고요. 도산공원으로 도산의 묘소를 이장하고 지금의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에도 참여했어요.”

스스로 “도산에 미쳐 살았다”는 그다. 졸업 후 산업은행에 취직한 뒤에도 퇴근 후와 주말을 이용해 흥사단 일을 했다. 결혼식도 태극기가 걸린 흥사단 강당에서 올렸다. ‘무실 역행(務實 力行)’으로 대변되는 도산의 진실성과 성실함은 그의 인생의 이정표였다.

“도산은 진실을 생명으로 여겼어요. ‘나라가 망한 것도 이완용이 아닌 거짓 때문’,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고 하셨죠. 오늘날 사회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있으니, 선생께 혼날 사람들이 많아요.”
산은캐피탈 사장과 경남기업 사장, 성신양회 대표 등을 지낸 김 동문은 지난 3월 동양시멘트 상임감사에서 퇴직했다. 칠순을 훌쩍 넘겨서까지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직위에서든 도산의 생활 태도를 닮고자 했던 결과”라고 했다. 평소 근면 성실을 강조했던 도산은 미국 체류 시절 한인들을 계몽하기 위해 리버사이드의 오렌지 농장에서 손수 오렌지를 따며 본을 보였다.

대학 1학년부터 흥사단 활동 매주 ‘도산의 희망편지’ 발행

“‘오렌지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셨어요. 제자들은 그런 도산이 ‘한없이 크면서도 한없이 작았다’고 말하죠. 성실하고, 매사를 철저히 챙기면서도 크게 생각하신 분이었어요.”
도산이 바라던 독립을 이뤘지만 아직 통일은 오지 않았고 사회 분열과 갈등은 깊어져만 간다. 도산의 사상 속에 열쇠가 있을지 물었다.

“좌우 이념논쟁이 한창이던 70년대에 흥사단 내에서도 학생들이 두 갈래로 갈렸죠. 도산의 수제자인 장이욱 전 모교 총장께 ‘도산이 살아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물었어요. ‘대공주의(大公主義)’로 풀었을 거라 하시더군요. ‘대공주의를 어떻게 해석합니까’ 물었더니 ‘진무위 공무사(眞無僞 公無私)’, 거짓과 사사로운 이익을 버리고 공을 추구하는 것이라 답하셨죠.”

1920년대 도산은 대공주의를 주창하고 이념 차이로 분열된 독립운동계를 통합하고자 했다. 지금도 유효한 도산의 철학이다.

“통합의 리더십 때문에 간혹 사회주의자라는 오해도 받지만 도산은 이념을 떠나 지방색과 공리공론으로 분열된 사회를 어떻게든 통합하려 애쓴 분이에요. 또 도산을 민족개조론자, 혁명가로 보는 양론이 있는데 준비론자이자 점진론자라고 봐야 합니다. 차근차근 자본을 모으고 국민들을 한데 뭉쳐서 독립을 준비하자고 하셨죠.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르게 인재를 키운 것도 그 때문이에요.”

사업회는 산하에 도산학회를 두고 도산의 사상을 연구하는 한편 기념관 전시와 청소년 체험학습 프로그램 등을 통해 도산의 정신을 알리고 있다. 매주 목요일 약 2만명의 독자에게 이메일로 발행하는 ‘도산의 희망편지’엔 희망을 주는 도산의 명언들을 담았다. 강남구에서 기념관 유지관리비를 담당하지만 사업회 활동비는 임원 회비와 보훈처 보조, 후원비로 충당한다. 소액도 부담없이 후원할 수 있도록 김 동문은 자신의 명함에 후원 계좌를 새겼다. “도산이 말년에 평양에서 손수 지어 은거한 송태산장을 재현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도산공원을 걸었다. 도산의 동상과 묘소 앞에 선생이 생전에 좋아했다는 붉은 장미 조화가 한아름 장식돼 있었다. 지난 80주기 추모식때 김 동문이 놓아둔 꽃이다. 문득 그가 말해준 대학 시절 추억담이 떠올랐다. “3년 동안 문리대 교정에 있는 4·19 기념탑에 생화를 바쳤어요. 어느날 누가 매일 꽃을 두고 가는지 궁금해 하던 신문기자가 붙잡더군요. 이유를 묻기에 ‘4·19 정신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했죠.” 붉디 붉은 꽃처럼 선명하게 도산의 뜻을 지켜 가려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도산공원의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앞에 놓인 붉은 장미 조화. 도산 선생이 생전에 좋아했다는 붉은 장미는 병석에서도 도산의 머리맡을 지킨 꽃이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