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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호 2017년 1월] 문화 신간안내

나를 움직인 책 한 권 : 사랑과 혁명의 시 ‘닥터 지바고’

김연경 소설가



겨울방학이다. 지난 반년 동안 방치해둔 번역원고 파일을 연다. 겨울에 잘 어울리는 소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닥터 지바고’(1957: 이하 ‘지바고’)이다.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마뜩치 않은 구석이 많지만 독자의 눈으로 보면 역시 20세기 러시아, 즉 소련 소설 중 가장 사랑받을 만한 작품이다.


‘지바고’는 시대적으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두 혁명(1917년 2월 멘셰비키 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과 내란, 부분적으로 양차 세계 대전을 아우른다. 이 보편의 역사와 맞물려 유라, 토냐, 라라, 파샤 등 주인공들의 삶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의사가 된 유라, 즉 유리 지바고는 많은 시간을 시를 쓰는 데 할애한다. 그의 삶을 침범한 역사적 사건에는 대체로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한다. 사생활 역시 그러한데 아내(토냐)를 사랑함에도 ‘빨간 마가목 열매’, 즉 라라를 그리워한다. 역사와 사랑의 딜레마 앞에 선 그는 스스로를 ‘햄릿’, 정확히 햄릿 역을 맡은 연극배우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편, 라라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숭배해온 파샤(안치포프-스트렐니코프)와 결혼하지만 혁명과 내전 중에 거듭된 해후를 통해 지바고와 비극적인 사랑의 인연을 맺게 된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파샤의 운명은 더 절절하다. 구시대의 악을 척결하기 위해 그토록 사랑한 가족까지 내팽개치고 혁명에 뛰어든 그는 이후 토사구팽의 논리에 따라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그의 자살, 특히 바르이키노의 하얀 눈밭을 물들인 붉은 피는 혁명(이상)과 정치(현실)의 양립불가능성을 시적으로 보여준다. 하나같이 선과 미의 육화인 ‘젊은 그들’ 옆을 맴도는 ‘늙은’ 변호사 코마로프스키는 봉건제의 악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악역이 아니다.


모스크바의 유대계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파스테르나크는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겐치아의 전형이자, 소설가가 아닌 시인이었다. 무엇보다도 타고난 귀족적 성품상 소련이 요구한 과격한 이분법적 세계관과는 잘 맞지 않았다. 동반자 작가인 그가 스탈린의 저 악명 높은 숙청을 면한 것은 ‘조용한 광기’, 아니 ‘광기의 조용함’ 덕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지바고’가 소련도 아닌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간되어 이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 냉전시대의 역학관계에 힘입어 물의를 일으킨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이 소설은 어쨌거나 문학사의 심판을 거쳐 살아남았다.


1988년을 전후한 언젠가, 두 동생이 잠든 늦은 밤에 ‘지바고’를 읽었다. 애지중지한 빨간색 라디오에서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 ‘지바고’(1965)에 삽입된 ‘라라의 테마’가 흘러나왔으리라. 지바고와 라라의 피난처처럼 쥐가 들끓는 단칸방에서 이런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참을 수 없이 문학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적 망명’에 처해진 시인이 쓴 소설을 무명의 아줌마 소설가가 번역하고 있는 이 정황 역시 그렇지 않은가. 그러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김연경(노문93-97) 소설가, 번역가


*김 동문은 1996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 ‘미성년’ 등과 최근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를 출간했다.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을 번역했으며 모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