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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호 2016년 1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권헌익 석좌교수 "더 자유롭고 철저하게 인간 조건에 대해 사유하겠다"

캠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서 전쟁사 연구, 경암학술상 수상
권헌익 캠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 

“더 자유롭고 철저하게 인간 조건에 대해 사유하겠다”

지난 11월 4일 부산 해운대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서 열린 제12회 경암학술상 시상식을 다녀왔다. 오랜 벗인 권헌익(철학81입)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가 인문사회 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축하해 주고 싶었다. 경암학술상은 2억이라는 상금도 그렇거니와 그 간의 수상자들의 면면이나 상의 권위 등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학술상이라는 것이 세평. 그동안 일관되게 유지해온 심사기준과 원칙은 첫째 학문적 독창성, 둘째 ‘현역’ 학자, 셋째 국가발전과 세계적 보편성에의 기여다.
글 : 전찬일(독문81-85) 영화평론가

전찬일 동문(왼쪽)과 권헌익 동문이 지난 11월 4일 부산 해운대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서 열린 제12회 경암학술상 시상식에서 만나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헌익 교수와의 인연·우정은, 인문대학 같은 반 급우로 만난 35년 전 1981년 대학교 1학년 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의 급우들 몇만 들면, 훗날 메가스터디 회장이 될 손주은(서양사81-87)이나, 국내를 대표하는 대중음악 평론가 강 헌(국문81-86), 현 인터넷 매체 아시아엔과 그 자매지 매거진N 발행인 이상기(서양사81-87) 등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들 중 그 누구와도 썩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권헌익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영화 평론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건 아니었어도 초등학교 저학년 이래 열정적으로 좋아해왔던 영화라는 내 주된 관심사와 학문으로 집중됐을 그의 관심사가 달랐거니와 ‘노는 물’이 달랐다. 시쳇말로 그는 ‘범생’이었다면 나는 ‘날라리’였던 셈. 

권헌익, 그는 그런 내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1년 재수 끝에 들어간 서울대가 안겨준 크디 큰 실망을 일정 정도 상쇄시켜준, 거의 예외적인 ‘어떤 천재’? 이건 결코 립 서비스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내게 ‘천재’라는 어휘와 함께 떠오르는 첫 번째 인물은 다름 아닌 권헌익이다. 

그 시절, 그다지 많이 나누지도 않았던 단편적 대화들이나 평소 그가 보였던 사려 깊은 애티튜드, 그리고 그 태도에 배어 있는 학구적 품위 등에서 나는 그의 천재적 아우라를 감지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석훈 박사와 나는 상통한다. 국내에서의 지명도로는 권헌익 교수를 훨씬 상회할 우석훈은 한겨레 2010년 11월 한 칼럼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내가 한국의 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을 다 만나본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내가 만난 한국 학자 중에서 ‘정말 이렇게 공부 잘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게 입 딱 벌어졌던 사람이 세 명 있다. 세상의 평가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중에 제일은 권헌익 교수였고, 그다음이 장하준 교수와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하시는 서울대 경제학과의 이지순 교수였다”고. 대체 그 학문적 깊이가 얼마나 깊기에, ‘88만원-세대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공동 저자 박권일, 레디앙, 2007) 등을 통해 스타 경제학자로 평가 받고 있던 이로부터 그런 대단한 상찬을 받을 수 있었던 걸까? 결국 나는 그 어릴 적에 이미 권헌익의 학문적 잠재력을 예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석훈은 이렇게 덧붙였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본 가장 안타까운 사건은 권헌익 같은 좋은 학자가 한동안 시간강사를 하다가 런던의 정경대학(LSE) 교수로 가버린 일이다. 만약 그가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많은 대학원생들이나 박사과정생에게 정말 좋은 스승이 되었을 것 같다. 그가 한 얘기는 더 간단하다. ‘고전으로 돌아가자.’ 그 얘기를 한국은 못 알아들었고, 영국은 알아들었다.” 이 지점에서 우석훈과 나는 엇갈린다. 권헌익이 영국으로 가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교수가 됐더라면 지금과 같은 세계적 인류학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 땅의 어느 대학에서 러시아 시베리아 동부의 토착 수렵 사회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1993)을 쓴 학자에게 그 ‘잘난’ 교수직을 주었겠는가? 

권헌익 동문



오해의 소지가 있어 수정·부연도 필요할 듯. 권헌익 교수가 LSE로 간 때는, 2011년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가 되기 2년 전인 2009년. 그가 교수로서 첫 걸음을 딛게 된 것은 1993년 맨체스터대 사회인류학과 조교수로 임용되면서부터다. 이후 95년부터 98년까지는 케임브리지대 사회인류학과 에반스 펠로우, 2009년까지는 에딘버러대 사회인류학과 조교수 및 부교수를 거쳐 LSE에 부임했던 것.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이 시점, 고백컨대 나는 인류학자 권헌익의 학문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또 하나의 냉전-인류학으로 본 냉전의 역사’의 서문과 첫 장만 읽어봐도 그 수준은 당장 짐작된다. 기존의 서구 중심적 시선을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 관점으로 냉전을 분석·기술한, 그의 세 번째 단행본. 권 교수가 냉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89년 10월에서 1991년 5월까지 시베리아에서 진행한 ‘구소련 시베리아 원주민 수렵사회 환경의 역사 연구’에서다. 

이 과정에서 소련이 해체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광경을 지켜봤던 것.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전 지구적으로 냉전이 종식됐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냉전의 공간성은 통일된 공간성인가? 그러면 시간성 역시 통일된 공간 속에 하나의 시간밖에 없는가”로 이어졌고, 그 대답으로 이 책이 탄생했다.
학자로서 권헌익의 존재감을 세계적으로 각인시킨 첫 단행본은 ‘학살, 그 이후-1968년 베트남전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인류학’. 이 책으로 2007년 미국인류학회로부터 ‘인류학의 노벨상’이라는 클리포드 기어츠상을, 최근의 두 차례 만남에서 흥미로운 책이라며 내게 강추한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홍석준, 박충환, 이창호 역, 산지니)로 2009년 미국아시아학회로부터 조지 카힌상을 받았다는 사실 등에서 그 권위 및 위업은 확연히 확인된다. 

권헌익 교수는 일찍이 “개념을 장악하는 것이 세상을 장악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친 바 있는데 북한을 ‘극장국가’(‘극장국가 북한 -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정병호 공저, 창비)로 칭했으니 그 얼마나 효과적 개념 규정인가.     

경암상 수상 이유에 명시돼 있듯이 이 저서들은 냉전사 및 글로벌 현대사에서는 물론, 외교사와 전쟁사 등의 사회과학 분야, 아시아학과 유럽학 등의 지역연구 분야에서도 널리 인정받는 명저들이다. 권헌익 교수는 “한반도 분단의 과거의 탈분단의 미래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해, 아시아의 탈사회주의 과정에 대한 비교로 연구 범위를 넓히고 있으며, 실증적인 현장 연구와 창의적인 이론 연구를 통해 세계 인류학계에 크게 기여”해온 탁월한 인류학자다. 그 탁월함과 권헌익 고유의 인간미는 강렬하면서도 겸허한 수상 소감에도 축약적으로 드러난다. 

“…현대인류학은 냉정하고 실제적인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 현실이 관계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 현실 속에 때론 눈에 보이는 실제를 넘어서는 또 다른 실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를 넘어서는 실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적이고 윤리적 존재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오늘 이 상을 이때까지의 업적에 대한 칭찬이 아니고, 앞으로 더 정진·매진하라, 더 자유롭고 철저하게 인간의 조건에 대하여 사유하라는 격려와 가르침으로 받습니다.  앞으로도 이 땅에 정신을 두고 세계의 역사를 끌어안으며 우리 모두가 처한 역사적 조건을 보다 더 명료하고 보다 더 적실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이에 보답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전쟁사 연구에 천착해 온 세계적인 인류학자
2016년 경암학술상 인문사회 부분 수상 영예 


권 동문은
 
철학과 2학년 때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 정치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딱딱한 정치학 안에서는 사람 사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꿔 케임브리지대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1993년 31세의 나이에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로 임용돼 현재는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로 있다. 트리니티칼리지에 한국인 교수가 임용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트리니티칼리지는 케임브리지 31개 칼리지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곳으로, 노벨상 수상자 32명을 비롯해 아이작 뉴턴, 프랜시스 베이컨, 버트런드 러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등을 배출했다. 현재 지역적·지구적 맥락에서 한국전쟁의 역사와 기억을 탐구하는 ‘한국전쟁을 넘어서’라는 국제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저서로 학살, 그 이후  ‘또 하나의 냉전’ ‘극장국가 북한(공저)’, ‘베트남 전쟁의 유령’ 등이 있다. 


권 동문 대표 저작 ‘학살, 그 이후’ 인류학의 노벨상인 ‘기어츠 상’ 1회 수상

‘…원숭이 해인 1968년 정월 24일. 베트남 중부 하미는 마을 사람 전체가 전쟁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끔찍한 비극을 겪었다. 운명적인 이날, 다당 남쪽에 있는 해안의 작은 마을에 3개 소대의 외국군 병사들이 세 방향에서 다가와서 마을 사람들을 세 곳에 따로 모았다. 장교의 신호로 자동소총과 유탄발사기가 불을 뿜으면서 학살이 시작됐다….’  


미라이 민간인 학살 이후 한 세대가 흘렀지만, 이 비극이 남긴 유산은 베트남과 세계 곳곳에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다. 권 동문은 베트남전 당시 하미와 미라이에서 벌어졌던 학살과 그 이후의 일을 냉전 구조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류학자 특유의 통찰력을 통해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이 남긴 민간인 학살의 유산을 탐구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일상생활, 특히 그들의 가정의례에 직접 참여하며 조사하고 연구하여 전쟁의 폭력을 재구성하고, 그들만의 추모와 위로의 변화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권 동문은 “인간의 모든 죽음은 좋은 죽음이든 나쁜 죽음이든 이편의 죽임이든 저편의 죽음이든 애도와 위로를 받을 절대적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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