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465호 2016년 12월] 기고 에세이

스무 송이 꽃다발의 힘

이상규 SR하우징 고문, 모교 검도동문회장


스무 송이 꽃다발의 힘

이상규(영문65-69) SR하우징 고문, 모교 검도동문회장



아내가 교회에 다닌 지도 꽤 오래되었다. 나는 신앙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지만 믿음이 잘 안 생기고 구속되기가 싫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아내의 생일이 크리스마스와 겹쳐 12월 25일에는 매년 가족과 함께 예배 보러 간다. 아내가 느지막이 권사 직분을 받았다. 그런데 바깥양반도 전도 못 하는 신도가 무슨 권사냐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는 눈치였다. 가끔 미안한 마음에 별 일이 없는 일요일이면 따라 나서기도 한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평일에는 업무에 바빠 여유가 없고 주말에는 등산이다 골프다 해서 시간을 내지 못 했다. 토요휴무제가 시행되어 여유가 생겼는데도 생활 패턴에 도무지 변화가 없자 잘 참던 아내가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무슨 주말 과부냐’고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는 ‘자유부인’을 선언하고 나섰다. 스키를 배우기 시작하더니 생일 선물은 백화점에 갈 필요 없이 현금을 달라고 했다. 어느 날부터는 단독 해외여행을 가기 시작했다. 나는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한편 속박에서 풀려나는 해방감에 못 이기는 척 아내의 요구를 받아 들였다. 아내가 성가대원이 된 것이 그 무렵이었다. 맑고 고운 목소리에 평소 노래를 좋아하는 아내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처녀시절부터 즐긴 수영과 함께 성가대 생활은 그녀의 일상으로 정착되었다.


어느 날 아침식탁에서 아내가 말했다.


“오늘 밤에 우리 교회에서 강동 지역 교회 성가대회가 있어요.” “뭐, 그래서 나보고 오라는 거요?” “바쁘면 하는 수 없고. 두 달 연습 했어요.”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데를 가나?”
그런 일에 좀처럼 남편을 끌어들이지 않는 아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금방 거절하기가 뭣해서 가타부타 대답을 않고 집을 나섰다.


월요회의를 끝내고 차를 마시면서 상사에게 의견을 구했다. 투박한 경상도 사나이지만 결단력이 있어 평소 주위의 존경을 받는 사람. 얘기를 듣고 난 그는 꽃다발을 가지고 가라고 권했다. 몇 년 전 생일 날 꽃다발을 사갔더니 아내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효과 만점이었다는 것이다. 선물 사는 것보다 비용도 훨씬 덜 든다고 너스레를 떨어 한바탕 웃었다. 발표회에 가는 것도 쑥스러운데 꽃다발까지 들고 가라는 제안에 나는 난감했다. 망설이다가 마음을 다잡고 건물 지하 꽃가게에 들렀다. 가게주인 여자는 잘 생각했다면서 장미 스무 송이를 엮어 탐스러운 꽃다발을 만들어주었다. 비싸다 싶었지만 정성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흥정도 못 하고 들고 나왔다. 가을 오후의 햇살이 익숙지 않은 내 이른 퇴근길을 한가로이 비추고 있었다.


아내는 교회에 갔는지 집에 없었다. 나는 꽃이 보이지 않도록 투명비닐 위에 신문지로 둘둘 말은 꽃다발을 옷자락에 숨겼다. 그러고는 얼추 6시에 맞춰 아파트를 나왔다. 주위를 살폈지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온 몸이 근질근질했다.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를 가로 질러 길 건너 교회를 향했다. 500미터 거리가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교회는 각 지역 성가대 가족과 성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한쪽 구석으로 비집고 들어가 서서 한 시간여 성가 발표를 들었다. 대원들은 온 힘을 다해서 예수를 찬양하고 할렐루야를 외쳤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면 언제 앞으로 나가서 꽃다발을 전해야 하는지에 신경을 쓰느라 노랫소리가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마지막 순서로 파란 줄무늬에 흰 예복을 입은 우리 동네 교회 성가대원 100여 명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아내는 앞줄 오른 쪽 세 번째 자리에 서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성가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아내는 지휘자와 악보를 번갈아 보면서 열심히 성가를 불렀다.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열창하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했다. 온 열정을 거기에 몽땅 다 퍼붓는 것 같았다. 나는 아내의 그런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가슴이 울컥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왔다.


박수 소리와 함께 담임목사가 무대 위로 올라와 인사를 했다. 꽃다발을 싼 신문지를 벗기자 탐스러운 장미 스무 송이가 향기를 내뿜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쑥스러움을 참고 앞으로 나갔다.
“어머, 윤형이 아빠 오셨네!”
몇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환호 소리가 들렸다. 나는 상기된 얼굴로 서있는 아내에게 마치 기사처럼 꽃다발을 건냈다.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내미는 손들을 잡고 악수를 나누고 우리 부부는 터지는 플래시에 몸을 맡겼다.


이튿날 몇몇 집에서 부부싸움이 났다고 했다. ‘교회 다니지도 않는 윤형 아빠는 꽃다발까지 들고 왔는데 당신은 나타나지도 않느냐’는 식의 원성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 말을 전하는 아내의 말투에 자랑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몇 번 더 성가대 행사에 참가했지만 나의 꽃다발 이벤트는 거기까지였다. 간혹 교회에 가면 아직도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이 있다. 며느리가 말한다. “아버님은 교회도 안 다니시는데 저희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아요.” 나는 그냥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