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호 2016년 12월] 문화 신간안내
나를 움직인 책 한 권 : 정희재의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이름 불러주기를 바라는 외로운 이들에게
나를 움직인 책 한 권
이름 불러주기를 바라는 외로운 이들에게
정희재의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손희준(언론정보93-00) EBS PD,‘책처럼 음악처럼’ 연출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란 문장으로 시작하는 노래,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 밤 라디오의 단골 신청곡이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신청곡으로 접수되는데 그렇다고 매일 들을 수는 없는 일. 이 음악을 틀어야 하는 가장 정확한 순간을 판단하는 것은 담당 PD가 늘 안고 가야하는 걱정 중 하나다. 이 노래를 왜 이렇게 듣고 싶어할까?
이 도시에서 우리(나)는 바쁘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누군가의 요구로 그렇게 됐겠지만 이제 무언가를 빨리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스스로가 더 불안하다. 어김없이 마감시한을 지켜 보고서를 제출했다. 특히 그 문제에는 직장생활 16년의 전문성을 발휘했다. ‘나 정도 되니까 해결한 거다’, 편성 개편의 방향에 개성이 없다는 지적에는, 몇 마디 추상적이지만 그럴듯한 단어를 요리조리 가져다 붙여 말끔하게 합리적으로 대응했다. 후배가 주저하며 판단을 요청한 그 사안을 단칼에 정리하면서는 ‘너는 별걸 다 걱정하는 구나’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걱정’ 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낮’ 동안의 나다. 하지만 밤은 매일 찾아온다. 아직 오늘의 마지막 일이 끝나지 않았다.
오프닝 시그널이 잔잔히 울려퍼지면 우리(나)의 밤 여행도 시작한다. 바쁜 일상에서 나도 모르게 놓쳤거나 일부러 외면했던 소중한 것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청취자들도 스스럼없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꺼내어 서로 공감하는 장이 펼쳐진다. ‘이별의 슬픔’ ‘경제적 곤란’ ‘가족의 건강’ ‘사랑의 미숙’ ‘외로운 생일’ 같은 걱정과 ‘건강의 회복’ ‘취업과 합격’ ‘행복과 사랑’ 같은 희망과 바람에 관련된 것들이다.
‘취업 준비하면서 매일 고민 나누며 들었었는데 오늘 1년 만에 찾아왔어요. 아직 똑같네요. 정말 고마워요 여전히 이 밤을 지켜줘서, 그대로 있어줘서’. 최근에 한 청취자가 보내준 사연이다. 그대로 있어줘 고맙다는 말. 2년 전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언젠가 꼭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걱정하고 있을 시간에 실체를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없이 소리치고 있는 ‘낮’의 우리(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음악과 사연에 좋은 책을 더하면 우리 라디오 프로그램이 완성된다. 무수한 책들 중에서 밑줄 긋고 오래 기억하고 곱씹고 싶은 문장과 내용을 가진 것들 추리고 추려왔다. 지금 딱 한권만 소개하라 한다면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를 고르겠다. 저자 정희재 작가는 도시를 “서로의 곁을 내주지 않는 익명성을 편리로 인정해주는 공간”, 도시인을 “익명의 공간에서 시치미를 떼며 살지만, 누군가 가끔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사무치게 바라는 외로운 사람들”이라 정의하고 우리가 서있는 여기에서 행복을 발견하자고 이야기한다. 도시에서 작가가 살며 배워나간 기록들은 마치 내가 느꼈으나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표현하지 못한 것, 분명히 겪었으나 바쁘게 다른 사건에 휩쓸리다 놓쳐버린 삶의 진실들이다.
책은 밤의 라디오를 닮아있다. 속으로 소리내 한줄씩 읽다보면 밤의 라디오를 듣는 느낌이 든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치는 밤”이 찾아올 때 어디를 펼쳐 읽든 위로가 될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아직 방송에서 소개하지 않았다. 언젠가 다가 올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이 책의 문장들을 소개하려 한다. 밤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그날. 참 슬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