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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호 2015년 9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오준 주유엔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

한국인 첫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의장에 선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 의장에 대한민국 유엔대표부 오 준(불문74-78) 대사가 선출됐다. 경제사회이사회는 총회,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신탁통치이사회(현재 폐지), 사무국, 국제사법재판소와 함께 유엔의 6대 기구 중 하나로 만들어졌으며, 한국인이 의장을 맡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 준 동문은 많은 젊은이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외교관이다. 작년 말 안보리서 한 북한인권 관련 연설 영상이 SNS를 통해 퍼지면서 2030세대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아마추어 화가이면서, 유엔 최초의 앰버서더 록밴드 ‘UN Rocks'의 드러머이기도 한 오 동문을 이메일로 만났다.


근황을 들려주세요.
“유엔은 해마다 9월에 정상급 회의를 시작으로 새로운 회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 준비로 바쁘게 지냅니다. 우리나라가 지난 해 말 2년 임기의 안보리 이사국 활동을 마쳤습니다만, 최근 북한의 DMZ 도발사태에서 보듯이 한반도 상황은 언제라도 유엔 안보리의 논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기 어렵고요. 또 지난 7월 제가 경제사회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된 후 경사리를 1년간 운영해 나가는 일도 저와 저희 대표부의 큰 일거리입니다.”


최근 남북한 사태에 대해 유엔에서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유엔에서는 과거 80년대까지 한반도 문제는 남북한 간의 대립상황이 중요한 의제였지만, 최근 10년간은 주로 북한 문제만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즉, 북한이 2006년 첫 핵실험을 한 이후 안보리의 제재가 계속 강화돼 왔고, 또한 총회나 인권이사회에서 북한인권 결의안이 매년 채택되다가 작년에는 안보리에까지 상정됐지요.


그러다가 3년 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과 같은 북한의 도발이 있어서 다시 남북한 간의 대립이 유엔의 관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 북한의 DMZ 도발로 시작된 긴장상태가 안보리에서 다루어지기 전 남북한 간의 협상을 통해 타결된 것은 큰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른 나라 대사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북한의 무력 도발은 과거에도 자주 있어서 특별한 관심을 끌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대북 확성기 방송에 북한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데 대해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심리전 방송에 대해서는 같은 심리전으로 대응하면 될 텐데 왜 무력 대응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지요. 북한 체제의 경직성과 그에 따른 정보 전파에 대한 취약성을 제3자가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겠지요. 아무튼 남북한이 다시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인도적인 문제들을 협의하고 대화와 교류를 확대하기로 한 것은 유엔의 관점에서 볼 때도 오래간만에 한반도에서 들려오는 희소식입니다.”


2년여의 유엔대사 임기 중 작년 말 안보리에서 연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30년이 넘는 외교관 생활의 대부분을 유엔을 중심으로 한 다자외교로 보냈기 때문에, 유엔대사 업무가 생소하지는 않지만, 제가 그간 경험하고 익힌 것 모두를 이번 유엔대사 임기에 투입한다는 느낌입니다. 특히 처음 부임해 1년여는 안보리 이사국 대표로서, 그 후에는 경제사회이사회와 장애인권리협약 의장으로, 유엔의 3대 분야인 평화, 개발, 인권이 모두 망라된 활동을 하게 되어서 외교관으로서의 마지막 기여라고 할 수 있는 유엔대사 직무에 보람을 느낍니다.


작년 말 북한인권 연설도 저로서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차원에서 했을 뿐이지만, 많은 분이 동영상을 보고 소통해 오는 등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사실 유엔에서 다루는 수많은 국제 문제에는 우리 모두의 삶과 직결된 일들이 많은데, 외교라는 전문 영역에서 다루어지다 보니까 일반인들의 마음에 와 닿게 전달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끔 그러한 접점이 생기는데, 아마 저의 연설도 그 경우에 해당한 것 같고요. 세계화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그런 공감의 영역이 지금보다 훨씬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엔경제사회이사회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포부 등을 들려주십시오.
“경제사회이사회는 총회, 안전보장이사회와 함께 유엔의 3대 실질기관 중의 하나이며, 경제, 사회와 관련된 모든 이슈를 다루니까, 총회를 제외하고는 가장 폭넓은 의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엔의 5대 지역그룹에서 의장 1명과 부의장 4명이 선출되어 1년 임기의의장단을 구성하죠.


저는 지난 7·24 의장 취임연설을 통해 4가지 중점과제를 제시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사회이사회가 현실 세계에 대한 ‘적실성(relevance)’을 높이는 것입니다. 즉, 경사리의 활동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동떨어져서는 안 되고, 실제로 전 세계인의 삶과 현실에 있어서 시급하고 중요한 일들을 다뤄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유엔의 토의가 현실적이기 보다는 탁상공론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아 온 게 사실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선진국과 개도국을 막론하고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불평등(inequality)’ 문제에 관한 특별회의를 내년 초에 개최하자고 제안했는데 좋은 반응을 받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외교 강국이 되기 위해 조언을 해주신다면.
“국가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과 함께 우리나라에 주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도전은 남북한 분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과거에 ‘분단의 관리’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한반도 분단 상황에 변화가 오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컸던 때도 있지만, 최근 몇 년간의 한반도 상황은 북한의 변화 가능성과 통일 대비 필요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한반도 자체의 상황 전개와도 맞물려, 우리의 현명한 역사 인식과 능동적인 대처가 중요한 시점이죠.


이런 때에 우리 외교에는 장기적인 국가전략에 기초한 국익의 추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외교정책에 있어서 장기적 국익과 눈앞의 단기적 이익을 양자택일의 문제로만 보기도 하는데, 저는 우리가 세계에서의 역할이 커질수록 장기적 국익과 단기적 이익이 합치되는 부분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러한 이분법적 접근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드럼 연습을 하고 있는 오 준 동문


외교관이 될 때 부모님의 영향이 컸나요.
“1950년대 초 저희 아버님이 LA 영사로 근무하고 어머님이 남가주대학에서 유학할 때 만나서 결혼하셨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드물게 외국 생활을 경험하셨죠. 그러나 저는 부모님이 한국에 돌아오신 후 태어났고, 외교관이 되기 전에는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3년의 미국 경험이 부모님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는지, 미국 이야기를 많이 하셔서 어릴 적부터 영향은 받았겠죠.


영어를 배운 것도 초등학교 때 어머님이 영어회화를 가르쳐 주었는데, 막상 중학교에 가서 정식으로 영문법 위주의 영어교육을 받게 되자 어머니는 왜 시험에 나오지 않는 불필요한(?) 영어를 가르쳐 주셨을까 의아해 했던 기억이 남습니다. 그 후 고등학교 때는 제2외국어로 독어를 배우고, 대학에서는 불문학을 전공해서 외무고시를 쳤을 때 외국어에서 유리했던 것도 같고요.”


가치관을 들려주십시오.
“후배들과 이야기를 할 때, 누구나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의 고뇌를 거쳐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가치관의 내용보다는 가치관을 갖게 되는 과정을 중시하는 거죠. 영어로 이러한 고뇌를 ‘soul searching’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혼(soul)을 찾는다는 뜻이니까 단순한 고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죠. 결국 자기를 찾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를 가진 분들은 종교적인 해답을 가질 수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각자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찾고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리할 수 있겠죠.


제가 ’스스로‘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냥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만 신경쓰며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다가 어떤 계기에 회의를 갖게 되어 뒤늦은 soul searching을 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관은 굳이 이야기 하자면 실존주의적 사고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림 실력이 대단하신데, 드럼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라고 들었습니다.
“누구나 취미가 한두 개 있듯이 저희 경우에는 그림과 드럼 연주인데, 좀 과장되게 알려진 것 같아 쑥스럽군요. 드럼은 대학시절 밴드에서 연주한 후에는 다시 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10년쯤 전에 외교부에서 음악동호회를 만들고, 유엔에서도 대사들의 밴드(명칭 UNRocks)에서 연주를 하게 되어서 끈질긴(?)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림은 중·고교 때 미술반 활동을 했는데, 요즈음은 일 년에 한 번쯤 거리의 풍경을 유화로 그려서 연하장<좌측 사진>으로 만들어 사용합니다. 두 가지 취미를 굳이 비교한다면, 드럼 연주는 꾸준히 연습하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반면에, 그림은 마음 자세가 ‘그림 모드’로 들어가야만 그릴 수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두 가지 모두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그렇겠죠.”


오준 동문은 매년 직접 그린 그림을 카드로 제작해 지인들에게 보낸다. 그림은 지난해 그린 연하장 이미지


뉴욕의 동문들과 모임을 갖고 있나요.
“싱가포르 대사로 근무할 때는 서울대동창회가 활발히 모였는데, 뉴욕에서는 아마 한인사회 규모가 너무 커서 그런지 총동창회 보다는 단과대학 별로 모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서울대 동문들은 어느 분야에서든지 성공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제 생각에는 단순한 사교 성격의 모임보다는 좀 더 다양한 방식, 즉 분야별로 강연회, 워크숍을 개최하거나 취미 활동을 체계적으로 함께 하는 모임 등으로 활동의 지평을 넓히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환갑을 맞아 청년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책으로 정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환갑이 옛날처럼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저에게는 성인이 되어 37년간 해오던 일, 즉 외교관 생활이 끝나는 나이라는 점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제가 책을 쓰고 있기는 합니다. 작년 말 저의 북한인권 연설 이후 많은 분들, 특히 강연, 방문, SNS 등으로 젊은 세대와 대화할 기회가 많아졌는데, 그들이 저에게 세상을 사는 고민을 털어 놓고 물어보는 질문들에 대하여 제가 페이스북 댓글로 일일이 답을 드릴 수는 없으니까 책으로 쓰기로 했다고 할까요. 그런 질문들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비슷한 과정을 겪은 선배로서 생각을 공유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요. 책은 처음 써 보는데,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책 쓰기가 드럼 연주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가까워서 집중하지 않고는 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쁜 활동 속에서 책을 쓰시는 분들이 존경스럽게 보이고, 제 책이 언제 다 될지 몰라서 이제 책 쓴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SNS에서 ‘2030’세대 열광 이끌어낸 ‘그 연설’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들은 그냥 아무나(anybodies)가 아닙니다. 우리 국민 수백만명의 가족이 북한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이제는 헤어짐의 고통을 냉엄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겨우 수백km 거리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북한 인권 유린 실태를 고발한)유엔 북한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보며 가슴이 찢어지고,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같은 비극을 겪은 듯 눈물 흘립니다. 안보리를 떠나며, 우리는 북한에 있는 무고한 형제자매들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북한 인권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부디 훗날 우리가 오늘을 되돌아볼 때 북한 주민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그들을 위해 말입니다.”




·오준 대사는


유엔업무에 정통한 다자외교 전문가


오 동문은 외교 생활 대부분을 유엔 업무로 일관해온 ‘유엔통’이다. 본부 유엔 관련직을 두루 거쳤고 주유엔대표부 근무만 4번째다. 이시영 전 외교부 차관과 함께 한국 외교관 중 최다 유엔근무 기록이다. 2등서기관(1985∼88년)으로 유엔대표부 근무를 시작해 유엔총회의장 비서실 공사(2001∼02년), 유엔대표부 차석대사(2005∼07년) 등을 거쳤다. 그는 해마다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만든 연하장 1천장을 전 세계 지인들에게 보낸다. 부친은 독립 유공자로서 외교부의 창설 멤버이기도 한 오우홍 미국 초대영사이며, 어머니는 건국대 학장을 역임한 진인숙 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