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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2015년 8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전성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부친께서 택한 길은 문화를 통한 독립운동”


전성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부친께서 택한 길은 문화를 통한 독립운동”


전 동문은 차이니즈 칼라 스타일을 즐겨 입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아들인 전성우(조소53입)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난 7월 27일 성북동 자택에서 만났다. 건축가 김중업 씨가 지은 단층집은 주변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졌다. 화가로 명성이 높은 전 동문은 지난해 허리 수술 후 회복 중이다.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구부린 자세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온 탓이다. 거동은 불편했지만 목소리는 맑고 친절했다. 사전에 보낸 질문지 내용을 숙지해 질문을 따로 할 필요 없이 추임새 정도면 족했다. 2시간에 걸쳐 모교 입학시절부터 최근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외부에 전시하기까지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대 교수시절을 떠올릴 때는 먼저 떠나간 제자들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 작품 활동이 어려우시겠어요.
“오랫동안 이젤을 사용 안 하고 큰 작품을 바닥에 놓고 작업을 하다 보니 허리에 무리가 간 것 같아요. 요즘은 간간히 소품위주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 회화를 줄곧 해오셨는데, 조소과 입학을 하셨어요.
“부산 송도 가교사 시절 입학을 했습니다. 모든 게 열악하던 시절이죠. 그림을 그릴 물감, 종이가 귀했어요. 어린 마음에 흙은 많지 않겠나 싶어 조소과에 입학했죠. 작품에 필요한 점토와 흙은 다른 건데…. 입학시험 문제가 ‘사과 다섯 개를 그려라’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창의적인 문제가 아니었나 싶어요. 실물도 없이 상상으로 그려야 했으니까.”

- 졸업을 못 하셨는데.
“1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울산 위에 병영이란 곳에서 부산까지 통학을 할 때라 송도에 도착하면 수업이 끝난 날이 많았어요. 공부할 환경이 못됐죠. 그림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 유학시험을 치렀습니다. 제가 아마 유학시험 보고 떠난 1호 학생일 겁니다. 당시 시험문제가 리더스다이제스트 한 부분을 요약하는 거 였습니다. 썩 잘 본 것 같진 않은데 합격을 했어요. 아버님께서 비행기표를 구해주셔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 유학 생활은 어땠나요.
“대학이 정해져 있진 않았어요. 도착하자마자 우선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송금도 안 되고 쩐쟁 중이라 한국에서 외환을 구할 수도 없었으니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좀 떨어진 과일농장에서 두 달간 일해서 생활비와 1년 학비를 벌었습니다. 숙식은 좋은 분을 만나 하우스보이(일종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해결했어요. 당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가장 좋은 아르바이트 직업이 요리사, 바텐더라서 두 직업 자격증도 땄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다 아버님 소개로 미국적십자사 한국지사에서 근무했던 분을 만나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처음 추상화를 보고, 이런 그림도 있구나 싶었죠. 일할 시간을 제하곤 모든 시간을 그림 공부에 쏟았습니다. 학교에 저를 눈여겨보시던 중국인 교수님이 계셨는데, 어느 날 꿈이 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여기 말고 미술전문학교를 가라’면서 소개장을 써 주셨습니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로 편입해 우등생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2학년 말에 편입해 가자마자 캘리포니아 주에서 개최한 미술대회에서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입선을 해서 인정을 받기도 했지요.
제가 미국에 체류하던 1953년부터 1965년까지가 미국 미술의 르네상스 시기였어요. 그 분위기에서 그림을 배웠으니 운이 좋았죠. 제 그림을 3백점 정도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돌아가신 지 3개월 후에. 아버님이 ‘한창 그림에 몰두해 있는데, 알리지 말라’고 하셨대요. 돌아오면 다시 나가기 힘들다고. 돌아가실 연세가 아닌데, 일찍 떠나셔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동양미술사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준비할 때도 큰 도움을 주셨어요. 당시 관련 서적이 중국이나 일본책이었는데, 꼭 필요한 부분들만 모아 다시 제본해 보내주셨죠. 소식을 듣고도 잡혀있는 전시회와 강의 계약들 때문에 바로 가지 못하고 1965년 귀국했습니다.”

- 귀국해 이대,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여학생들을 피해 서울대로 왔더니 여기에도 여학생이 많았어요. 남학생들은 고작 3명이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에게 저녁 8시까지 그림을 그리면 술을 사주겠다고 약속하고 지켜봤죠. 막걸리에 김치만 먹어도 좋을 때라 파전까지 사주니 아주 좋아했습니다. 많이 따라왔어요. 제가 한국에 와서 가장 관심 가진 게 국악과 오래된 사찰이었어요. 우리 것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컸죠. 시간 있을 때마다 남학생들과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리 문화를 체험했습니다. 그 때 저를 잘 따르던 학생 중에 김홍배, 정기용, 성완경, 박충흠, 이상국, 최병민 등이 있었는데 그 중 몇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사람들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 보화각이 있는 이 곳은 어땠나요.
“돌아왔을 당시 거의 폐허수준이었습니다. 6·25 전쟁 때 이곳에 북한군 기마대가 머물렀습니다. 1·4후퇴 때는 중공군 의무대가 들어왔고요. 터키군이 여기 건물을 사용하기도 했죠. 어떻게 됐을지 미국에 있을 때도 무척 궁금해서 오자마자 들렀는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손대기가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여담인데,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물건들을 가져가려고 나무상자를 만들었어요. 그 작업에 국립박물관의 최순우 선생님과 당시 명한 서예가였던 소전 손재형 씨가 동원됐어요. 그 분들이 열심히 만들리 없죠. 시간을 지연하다가 인천상륙이 시작되니까 북한군들이 다 놓고 도망쳤습니다. 1·4후퇴 때 그 나무상자에 물건을 싣고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열차 한 량 밖에 빌릴 수 없어 중요한 것만 챙겨 갔죠. 보화각 외 보성중학교 도서관 등 여러 곳에 한적, 문고류, 전집류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전시에 전국 여기저기로 흩어진 물건들이 많지요. 아버님은 잃어버린 물건을 우연히 발견하면 내거라 말하지 않고 다시 사셨어요.”

- 수집한 물건에 대한 기록이 없었나요.
“아버님이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으셨어요. 가족에게 말씀하신 적도 없고요. 아버님이 수집한 예술품에 대한 것은 대부분 최순우 선생님이나 외부 사람을 통해 들은 것입니다. 고려청자 등을 구입한 존 개스비와의 일화가 아버님께서 남기신 유일한 기록입니다.”

- 폐허가 된 보화각을 다시 정리하면서부터 ‘창고지기’의 삶이 시작된 거군요.
“최완수 소장과 지금 간송미술관장으로 있는 동생 영우가 많은 일을 해줬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을 잘 이끌고 있습니다. 함께 창고지기의 삶을 산 셈이죠.”

- 재단을 설립하고 외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간송미술관은 낡고 규모가 작아 큰 전시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침 서울시에서 제안이 와서 고심 끝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전시회를 갖기로 했죠. 아버님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바라셨을 거예요.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많은 분들이 관람하고 계셔서 많은 보람을 느낍니다. 재단 설립도 이런 일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향후 상설전시관 건립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 전에 후원회도 조직해야 하고요. 이런 일들은 제 자식들이 맡아 하게 될 겁니다. 다행히 자식들 모두가 이쪽에 관심을 갖고 도와주고 있어 마음 든든합니다.”

- 아버지 전형필은 어떤 분이셨는지.
“항상 겸손한 선비셨고 우리와 즐겁게 잘 놀아주는 자상한 분이셨습니다. 1943년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물감 세트를 사주셨는데, 하도 귀한 물건이어서 화가인 아버지 친구가 빌려갔을 정도입니다. 아버지 사랑방 약주 심부름하면서 어른들께 귀 동냥하며 배운 게 저를 화가로 이끈 산 교육이었죠. 하늘나라 가서 아버지 뵀을 때 ‘그동안 지키느라 고생했다’ 그 말 들으면 좋겠어요.”

유학길에 찍은 기념사진. 좌로부터 첫 번째 간송 전형필, 세 번째 전성우 동문. 이날 본 아버지가 전 동문이 본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이다.



- 마지막으로 동문들에게 한 말씀.
“아버지 간송께서 택한 길이 바로 ‘문화를 통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심리적 폐허를 극복하고자 서구 각국이 힘을 기울였는데 예술을 통한 치유와 복원이 주요 방법론으로 대두됐죠. 프랑스에서는 명문가 로쉴드의 자제들이 예술품 수장으로 문화적 국권이 회복되길 바랐고 미국의 페기 구겐하임, 필립 존슨은 시대적 책무를 예술품에서 찾았습니다. 간송이 하신 일도 이와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짓눌린 자존심과 강요된 열등감을 우리 역사·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통해 극복하길 바라셨습니다.

첨단의 시대일수록 정신성과 문화가 중요합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 우리의 뿌리는 조상의 얼이고 혼입니다. 새로운 것도 좋지만 옛것도 알아야 하고 교육도 그런 방향에 중점을 둬야죠. 뿌리가 튼튼해야 가지가 멀리 뻗고 잘 자랍니다. 누군가는 첨단을 개척할 때 누군가 뿌리를 지키는 일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김남주 기자>





간송미술문화재단 후원회 결성 추진”


간송미술관이 지난해부터 동대문 DDP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 DDP와 2017년까지 대여계약을 했다. 전성우 이사장은 “내가 지키는 세대였다면 다음세대는 소통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현재 재단은 장남 전인건 씨가 사무국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현재 펼치고 있는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우리 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대중에게 전시를 통해 전파하며 △간송의 삶과 정신을 알리는 일이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동대문 DDP 전시, 훈민정음 해례본 대중 보급, 서울 방학동 간송묘소에 간송공원 조성사업, 후원회 결성을 추진 중이다.

세계 유일의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70호로 지정돼 있다. 전인건 사무국장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교보문고와 함께 복간해 일반에 보급하는 사업을 기획하고 있다”며 “훈민정음 해례본은 우리 민족의 창의성과 애민정신을 보여주는 귀중한 책이다. 훈민정음 해례본과 해설 등을 담아 국내 학교와 해외 교포 등에 보급해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고취할 수 있게 하려 한다”고 밝혔다.

방학동 간송공원은 현재 간송 묘소 옆에 위치한 간송이 사용하던 한옥(등록문화재 제521호)을 복원해 이뤄지는 일로, 현재 복원 공사는 상당부분 진척이 된 상황이다. 현 성북동 간송미술관(보화각)이 낡고 규모가 작아 성북동 간송미술관 인근에 상설 전시관을 중장기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대기업의 후원을 받는 미술관이 아니라서 후원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개인의 힘만으로 계속 유지 발전해 나가기엔 한계가 있다.

전 사무국장은 “외국의 유명 미술관 박물관 등은 강력한 후원회가 존재해 지금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며 “우리 문화의 보고인 간송미술관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유지 발전시켜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간송미술관은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제135호 ‘혜원전신첩’ 등 국보 12점, 보물 제284호 ‘금동여래입상’ 등 보물 10점을 비롯해 김정희, 정선, 신윤복, 김홍도, 장승업 등 회화와 서예 작품, 자기, 불상, 서적 등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배움터 내 디자인박물관에 전시된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좌)과 국보 제294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전성우 이사장은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의 본고장 미국에서 12년간 유학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전 동문은 1960년 이후 지속적으로 만다라 시리즈를 선보이며 서구의 추상표현기법으로 동양정신을 구현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볼즈화랑(Bolls Gallery)과 전속 계약도 맺었고 순수 평화의 세계를 지향하는 ‘색동 만다라’라는 고유한 정신적 주제를 완성했다. 그는 미국 휘트니미술관이 기획한 ‘젊은 미국 미술 1960전’에 당당히 선발됐는데 동양인으로는 백남준 보다도 앞선 ‘최초’였다.
김광균 시인의 딸이자 매듭장(무형문화재)인 아내 김은영 씨와 사이에 2남 2녀를 뒀다. 장녀 인지 씨는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인아(서양화89-93) 씨는 모교 미대를 졸업하고 서양화가로 활동 중이다. 장남 인건 씨는 간송문화재단 사무국장과 보성중고등학교 행정실장을 맡고 있으며, 차남 인석 씨는 경영 컨설턴트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동생 전영우(회화59-63·고고인류63-66) 간송미술관장도 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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