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호 2011년 1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한화갤러리아승마단 서정균 감독, 역대 아시안게임 최다 6관왕 기록

한화갤러리아승마단 서정균 감독 역대 아시안게임 최다 6관왕 기록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는 승마 마장마술 종목에서 단체전과 개인전을 모두 휩쓸며 4연패를 달성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승마 마장마술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이후 1998년부터 지금까지 금메달을 한 번도 다른 나라에 내준 적이 없으니 그야말로 대기록인 셈이다.
그리고 또 놀라운 기록 하나. 비인기 종목이면서도 메달박스로 불리는 마장마술에서 역대 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 타이 기록이 나왔다. 무려 총 4회의 대회에서 6관왕을 차지한 기록인데, 한화갤러리아승마단의 서정균(체육교육 81-91) 감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국 ‘승마의 전설’이 되다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역사적인 일이 벌어졌다. 당시 모교에 재학 중이던 서 동문이 한국 승마 마장마술 사상 처음으로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딴 것이다. 승마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에서 나온 메달이기에 더욱 놀라운 결과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서 동문은 1998년 아시안게임 2관왕(단체전, 개인전)과 2002년, 2006년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며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보유한 선수가 됐다.
서 동문의 성적이 더욱 값진 이유는 마장마술은 한 대회에서 최대 수확할 수 있는 금메달이 단체전과 개인전 두 개뿐이라는 점이다. 서 동문은 1990년을 제외하고 1986년부터 2006년까지 총 5회의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4개의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 않고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성과다. 더욱이 1990년 베이징 대회에는 승마 종목이 없었고,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는 일본의 특수검역문제로 자기 말을 갖고 가지 못한 채 대여마로 경기를 치러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역대 아시안게임 6관왕으로 서 동문과 같이 금메달 수 타이를 기록한 양궁의 양창훈 선수는 1986년(4개)과 1990년(2개)에 금메달을 땄고, 마린보이 박태환 선수는 2006년(3개)과 2010년(3개)에 금메달을 딴 것과 비교해보면 서 동문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그가 한국 승마의 전설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렸을 때 너무 내성적이어서 성격을 고쳐보려고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로 처음 승마를 하게 됐어요.”
이렇듯 단순한 계기로 시작했던 승마는 그의 인생은 물론, 한국 승마계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처음에는 승마 종목 중 장애물비월과 마장마술을 둘 다 했었다고 한다. 장애물비월은 정해진 장애물 코스에 따라 말의 비월 기술성과 속도 등을 테스트하는 종목이고, 마장마술은 20mX60m 규모의 경기장 안에서 20여 개의 과목들을 수행하는 동안 선수가 얼마나 확실하게 말을 컨트롤할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경기다. 장애물비월이 말의 도약 능력을 중시한다면 마장마술은 말의 컨트롤에 중점을 둔다.
승마 종목 중에서 특별히 마장마술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장애물비월도 좋았지만 자기보다 10배나 더 무겁고 큰 동물을 컨트롤하면서 탄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껴 점점 마장마술 분야에 전념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모교에 재학 중이던 1982년에는 1년간 휴학을 하고 프랑스에 있는 소뮤르 프랑스 국립승마학교로 유학을 다녀왔다. 그 이후에는,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세계 승마계의 전설이었던 독일 선수 라이너 클림케(Riner Klimke)에게 2년 정도 사사했다.
그가 유학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과 유럽 승마 수준의 현격한 차이였다. 지금은 아시아 최강을 자랑하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 승마는 세계적 수준으로 볼 때 최하위 그룹이었다. “수백 년 동안 전수돼 내려온 기술, 항상 말을 옆에서 볼 수 있는 문화, 말들의 수준 등 무엇 하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고 서 동문은 말했다.
“올림픽 무대에 다시 서고 싶어”
그래서일까. 귀국 후 첫 메달을 따기까지 어려운 점도 많았다고 한다. 국가대표 선수라고 해서 훈련할 시간을 따로 할애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으로 훈련을 나갈 때면 휴학을 해야 했다. 그래서 모교를 졸업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다고.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승마 발전을 위한 인프라 구축은 부족한 실정이다. 일례로 현재 국내에 있는 승마클럽은 160여 개로 일본의 50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프랑스의 7,500여 개와는 비교조차 안 된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가 메달을 딴 게 신기할 정도다. 열악한 실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계속해서 메달을 따는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서 동문은 “메달을 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선배들이 있었고, 그런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후배들이 있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 같다”고 말했다.
승마가 대중화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승마는 돈 많은 사람들만 즐기는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굳이 자기 말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승마를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승마 인구의 저변 확대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 동문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승마를 하기 위해 돈이 많이 필요했지만 요즘에는 테니스나 골프를 치는 정도의 비용으로도 충분히 승마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많은 대학에서 승마 수업을 하고 있고, 동호회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라 좀 더 저렴하게 승마를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승마계를 이끌어가는 주역으로서 서 동문의 목표는 아시아를 넘어 올림픽에 다시 한 번 도전하는 것이다. 승마 마장마술에서 현재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서 동문이 개인전 경기에서 세운 10위가 최고다. “20년이 넘도록 제가 올림픽 때 세웠던 기록이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어요.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가 최고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꼭 다시 한 번 올림픽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올리고 싶어요. 제가 안 되면 지금 가르치고 있는 제자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불모지의 땅에서 금을 캐낸 그의 능력과 노력이 올림픽이라는 세계 무대에서도 자랑스러운 빛을 발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