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호 2023년 8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광복절과 근대시민의 탄생
오정환 공법83-87 MBC 부장 본지 논설위원
느티나무칼럼
광복절과 근대시민의 탄생
오정환
공법83-87
MBC 부장
본지 논설위원
광복절은 본래 정부 수립 기념일
한민족, 백성 아닌 시민이 된 날
1948년 5·10 총선이 발표되자 38선을 넘어오는 북한 주민들이 급증했다. 남한에도 정부가 세워져 안전해질 거라 확신한 것이다. 남로당이 선거 저지 테러를 자행해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지만, 내 나라를 세우겠다는 희망을 꺾지는 못했다. 유권자 96.4%가 선거인 등록을 했고 그중 95.5%가 투표했다.
개표 결과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 한민당은 29석에 그쳤다. 그러나 무소속 85석 가운데 숨은 한민당 의석이 많았다. 국회를 장악한 한민당은 내각책임제를 원했다. 이승만 국회의장이 신익희 부의장과 함께 헌법기초위원회를 찾아가 자신은 정부 수립에서 빠지겠다고 위협해 겨우 대통령제 헌법안을 관철시켰다.
이제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 이시영을 부통령에 선출했다. 이시영은 최근 ‘1948년 건국’을 부인해 논란이 된 이종찬 광복회장의 작은할아버지이다. 그밖에도 이승만은 거의 모든 각료를 독립투사들로 채웠다. 청산리대첩의 영웅 이범석 국무총리 등 해외 활동가들과, 국내에 있었어도 감옥에 한두 번은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3대 민족 인권 변호사 가운데 김병로는 대법원장, 이인은 법무장관이 되었고, 허헌은 북한으로 갔다. 국내외 인적 자산을 건국에 총동원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열었다. 일제 통치와 미 군정을 거쳐 드디어 38년 만에 나라의 주권을 되찾았다. 이승만은 건국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더 이상 양반의 교화나 공산당의 지도에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사적 자치의 주체’로 인정받게 되었다. 근대시민이 탄생한 것이다. 정부는 이날을 국경일로 정해 길이 기리기로 했다.
그런데 국회에서 국경일법을 만들며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이름을 바꿔 혼선이 시작됐다. 그때까지는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이 아닌 주권 회복을 광복으로 보았다. 1951년 8월 15일까지는 ‘제3회 광복절’로 기념했다. 그러나 점차 민간에서 광복을 ‘일제로부터 해방’으로 인식하고 언론이 이에 따라가면서 1945년 8월 15일이 광복일이 되었다. 단순히 기산 연도가 바뀐 것뿐 아니라, 안타깝게도 독립국가 수립의 역사적 의미마저 퇴색되어 갔다.
올해 8·15는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된 것과 함께 우리 민족의 손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운 사실도 기념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날은 5천 년간 권력의 지배 대상이었던 한민족이 근대시민으로 재탄생한 날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