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호 2022년 4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사장되던 건축용 3D 모델로 웹툰 창작자 날개 달아줬죠”
이민홍(건축10-17) 카펜스트리트 대표
“사장되던 건축용 3D 모델로 웹툰 창작자 날개 달아줬죠”
이민홍(건축10-17) 카펜스트리트 대표
3D모델 판매 플랫폼 ‘에이콘’ 국내외 창작자에 인기
포브스 ‘아시아 30세이하 리더’ 선정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명제가 뜨거운 화제다. 동의하든 아니든, 2022년 현재 우리의 공간과 의식은 변화하고 있다. 박람회도, 입학식도 3차원(3D) 가상공간에서 열리는 시대다. 창작과 사고의 중심축은 이제 3D 세계로 이동 중이다.
건축학도 출신의 한 청년이 기민하게 이 흐름을 읽고 사업을 차렸다. 이민홍 카펜스트리트 대표다. 그는 2019년 웹툰과 게임 등 콘텐츠 창작자에게 3D 모델과 디자인을 판매하는 플랫폼 ‘에이콘3D’를 출시했다. 올해 초 6개 투자사로부터 100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를 받았다. 보통 시리즈A 투자 규모인 30억~50억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하나의 건축 프로젝트엔 정말 많은 애정과 열정이 담깁니다. 그럼에도 노력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아쉬웠어요.”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 동문이 밝힌 창업 동기다.
건축가들의 외장하드엔 잠자고 있는 3D 모델이 수두룩하다. 몇 달 밤을 새워 준비했으나, 공모전과 입찰에서 떨어져 건축으로 실현되지 못한 작품들이다. 이렇게 사장되는 고퀄리티 3D 모델들이 연간 10만여 건. 안타까운 마음에 새로운 쓸모를 찾아나선 그의 눈에 웹툰과 게임 시장이 들어왔다.
“웹툰, 게임, 메타버스 창작자들의 작업시간이 길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콘텐츠에 등장하는 공간과 소품까지 전부 그리거나 제작하기 때문입니다. 3D 모델을 사용하면 많은 부분을 효율적으로 그릴 수 있고, 그렇게 아낀 시간에 스토리와 연출을 고민하거나 휴식할 수 있죠. 건축가의 창고(Architect’s Container)에서 잠들어 있던 제품을 꺼내자는 의미로 에이콘(ACON)이란 서비스명을 짓고, 한 다리 건너 지인들의 3D 작품 10개 정도를 업로드해 봤어요.”
유명 인테리어 스타트업에 재직하던 그는 아이디어에 공감한 동료와 창업에 나섰다. 주1회 70컷씩 그려야 하는 웹툰 작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건축·인테리어·3D 디자이너 등이 에이콘에 3D작품을 올리면, 창작자는 원하는 것을 골라 웹툰과 게임 등의 배경으로 쓴다.
현재 200여 콘텐츠 파트너가 제공한 5000여 개 3D 모델에는 물컵, 자동차 같은 소품과 학교, 회사, 공원 등 건물과 도시를 통째로 구현한 작품, SF물 작가라면 눈을 빛낼 외계행성도 있다. 프로그램으로 각도 등을 조정해 바로 쓸 수 있으니 한 컷당 2~3시간씩 걸리던 작업시간이 3~5분으로 줄어든다. 문하생을 동원해 일일이 손으로 배경을 그리던 옛 만화가가 본다면 ‘세상 좋아졌다’ 하겠다.
“지금까지 16만 건 정도의 3D모델 시장과 콘텐츠 시장 간 콜라보레이션을 성사시켰습니다. ‘이제 예전 방식으로 못 돌아가겠다’, ‘덕분에 작가로 데뷔하고 연재도 계속할 수 있었다’는 창작자들의 말씀을 많이 들어요. 건축계 지인,동기들도 재밌는 접근이라 생각해주셔서 더 즐겁게 달릴 수 있었죠. 제대로 마케팅도 안 했는데 프랑스 작가가 에이콘을 이용하고 싶다고 연락이 오더니, 지금은 북미, 일본, 인도네시아 등 해외 창작자들이 콘텐츠를 사러 옵니다. 최근엔 3억명이 이용하는 중국 최대 웹툰 플랫폼과 협업을 시작했고요. 더 많은 국가의 창작자들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고 싶어요.”
에이콘 3D에서 판매하는 학교 배경 3D 모델 캡처(제작자 철1285)
필연적으로 가상의 세계를 다뤄온 건축계도 가상현실 속 건축 등에 관심이 비상하다. 이 동문은 건축을 공부하면서 일찍이 3D 모델의 확장성을 알아봤고, “가상 공간과 3D 공간에서 소통하는 방식이 안착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웹툰 시장도 크지만, 더 넓은 영역에서 성장 잠재력을 인정받았기에 대규모 투자 유치도 가능했다.
“현대인은 현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이상으로 게임과 웹툰, 드라마, 영상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그 속에 풍덩 빠져 지내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확장돼 가는 셈이죠. 새로운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공간이 만드는 영향력은 커지게 마련이고, 늘 좋은 공간을 만들고자 고민하는 건축과 굵은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펜스트리트는 게임과 메타버스, 가상현실·증강현실, 애니메이션 콘텐츠 시장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할 겁니다.”
카펜스트리트라는 사명은 과거 공간을 만드는 사람을 일컫던 목수(Carpenter)와 그들이 모이는 길(Street)을 결합한 것. 이 동문은 “공간과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더 재밌게 활동하고, 일반인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 드린 것 같아 즐겁다”고 했다. 공동 창업자 서정수씨와 지난해 포브스 ‘아시아 30세 이하 리더’에 선정됐다. 이젠 팀원이 43명으로 늘었다.
사업 발단이 된 전공 외에 서울대에선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답을 찾아냈던 경험”을 얻었다. 6인조 대학 밴드 ‘레어캔디’에 몸담아 음악 창작활동도 했다.
“상상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행위는 역사 속에서 꾸준히 발전해왔습니다. 음성으로 얘기를 주고받다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리고, 사진과 영상을 찍으면서 점점 현실 경험에 가까워졌죠. 이젠 3차원적인 사고와 표현이 자연스러운 시대 흐름이 됐습니다. 처음 사진과 영상이 등장했을 때처럼 모든 창작시장이 영향을 받을 거예요. 전 세계의 아름답고 놀라운 상상들이 더 많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카펜스트리트가 돕겠습니다.”
박수진 기자
▷3D 모델·디자인 플랫폼 '에이콘3D' 바로가기: https://www.acon3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