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28호 2022년 3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이희범 본회 회장 퇴임 인터뷰: “코로나에도 동창회비 두 배, 동문님들 고맙습니다”

이희범 본회 회장


“코로나에도 동창회비 두 배, 동문님들 고맙습니다”

이희범 (전자공학67-71) 본회 회장




아이디어 가득한 ‘공포의 노란 패드’ 들고 탱크처럼 사업 추진
사회공헌위·관악경제인회 발족으로 국가 기여 확대 길 터
돌아보니 시원섭섭…안동 낙향해 K컬처 뿌리 가꾸겠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 2년은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특히 총동창회는 대면 행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 실질적 활동 자체가 멈출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총동창회 회칙 제2조(목적)는 ‘회원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모교의 발전에 기여하며, 사회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이다. 친목 도모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경제적 환경과 정치적 분열이 악화하면서 모교 기여와 사회 공헌에도 어려움이 예상됐다. 동창회 내부 사정 역시 맞소송이 제기될 정도로 원심력이 심각했다.

그런 힘든 시기에 동창회장직을 맡았던 이희범 회장이 어느덧 퇴임을 앞두고 있다. 3월 10일 서울 마포구 장학빌딩 베리타스홀에서 그를 만났다.



대담·글 : 이용식(토목공학79-83) 문화일보 주필


-지난 2년 동안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에 동문의 한 사람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출 과정을 돌아보면, 난제들을 해결하라고 주위에서 강권하다시피 떠맡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상 시기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낸 것 같아요. 스스로 자랑 좀 해 주시지요.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취임할 당시, 동창회는 여러 가지 송사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사무처와 회장단, 사무처와 감사 등이 얽혀 고소와 고발이 난무했지만 이제 말끔히 정리됐습니다. 모두가 서울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지 싶어요. 제도적으로는 동창회장 임기를 1회 연임이 가능하게 조정하고, 관악회 이사장 임기와 일치시켜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동창회가 안정되면서 동창들의 열정과 참여가 높아졌어요. 재정적으로도 안정됐고요. 작년에 연간 회비가 평소의 곱절로 늘었고, 관악회 기부금은 예년의 4배인 43억원이나 모였습니다. 1000만원 이상 고액 기부자가 전년보다 2배나 많았죠. 장학빌딩 임대수익도 건물 구조조정을 통해 연간 53억원을 거두고 1123명 후배에게 장학금을 줬습니다. 숙원사업이던 역사연구기록관은 작년 10월에 착공해서, 2024년이면 모교 캠퍼스 안에 동창회 사무실이 마련될 겁니다.”

-코로나에 맞서 동창회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가장 컸지요. 포스트잇에 꼼꼼히 지시할 업무를 메모해 ‘공포의 노란 패드’란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많은 아이디어와 강한 추진력으로 정평이 났는데, 어떻게 전화위복 삼았는지요. 차기 집행부는 물론 여러 모임에도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동창회장에 취임하면서 ‘평생 학습하는 동창회, 취미를 살리면서 함께 즐기는 동창회, 회원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동창회,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동창회’란 4대 비전을 제시했어요. 자주 모여야 가능한 일인데, 정부의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2년 연속 홈커밍 행사를 열지 못했습니다. 대규모 행사는 번번이 취소되거나 축소됐고요. 대신 소모임에 집중했지요. ‘조찬포럼’과 ‘수요특강’을 열어 동문들이 급변하는 시대 새로운 지식, 4차 산업혁명시대에 갖춰야 할 덕목과 혜안을 얻도록 했습니다. 취미 모임으로 등산모임과 골프대회, 바둑대회와 국토문화기행 등을 진행했고, 모두 자리 잡았습니다.
또 서울대병원 등 전국 29개 병원, 더케이호텔 등 주요 호텔과 리조트, 식당 등과 제휴를 맺고 회원들이 각자 삶에서 동창회 복지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동문에게 최대 50%까지 편익을 주는데, 만족도가 높다고 합니다.”

-최근 발족한 ‘사회공헌위원회’와 ‘관악경제인회’는 의미가 특별하죠. 먼저 시작한 사회공헌위원회 활동은 어떻습니까.
“서울대 졸업생은 여러모로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았으니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회공헌위원회는 풍산그룹 류 진 회장님과 대림성모병원 변주선 원장님을 공동위원장으로 발족해 주무 부처 승인을 받았어요. 류 진 회장님께서 특별히 2억원을 기부해 주셨고, 동창회에서도 일정액을 출연해 올해부터 본격적인 공헌사업을 할 겁니다. 동문은 물론,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도 우리 손길이 필요한 초·중·고등학생과 다문화 가정,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하되 점차 지원 범위를 넓혀 나갈 것입니다.”

-사회공헌위원회도 그렇지만 관악경제인회도 국가에서 차지하는 모교와 동문의 위상을 생각할 때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분발해야 하겠는데요.
“44만 동문이 각계에 포진했지만 특히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위해 맹활약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개인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더 큰 시너지가 생기겠죠. 그래서 경제계에서 핵심 역할 하시는 분들을 모시고 ‘관악경제인회’를 발족했습니다. 이부섭(화학공학56-60) 동진쎄미켐 회장께서 초대 회장을 맡아 주셨습니다. 회원들의 역량과 지혜를 결집해서 회원 개인의 번영은 물론 사회에 공헌하고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게 될 겁니다.”

-코로나 때문에 하고 싶었지만 못 한 일도 더러 있으시죠. 더욱이 2020년 6월에 임기를 시작했음을 고려하면, 규정상의 임기도 다 채우지 않고 물러나는 셈입니다. 한 번 더 맡기자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왔던 것으로 압니다만….
“‘시원섭섭’하단 말은 이런 때 쓰는 거겠지요. 2년 세월이 정말 번개같이 지나갔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행복했습니다. 동창회를 활성화하고 44만 서울대인들을 하나로 결집하는 데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년 전 코로나 상황으로 6월 17일 총회를 열었기 때문에 제 임기는 6월까진데, 회계연도 개시일부터 3개월 내 총회를 개최한다는 회칙에 따라 금년 3월 28일 총회에서 후임 회장을 선출하려 해요. 후임이 선출되면 전임은 물러나는 것이 순리죠. 물론 팬데믹이 사람과 사람 간 교류를 막으면서 마음먹은 대로 운영하지 못해 아쉬움도 많았고, 한 번 더 회장직을 수행하라는 권유도 있었습니다만, 공인은 규율을 따르는 것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 회장님만큼 다양한 분야의 경험을 축적한 분도 드뭅니다. 우선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지원해 수석 합격한 이력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공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할 땐 과학자로 노벨상을 받는 꿈도 그렸습니다. 홀어머니 모시는 외아들이라 졸업 후 유학 갈 수가 없었어요. 당시 국내에 전자공업 붐이 일었지만, 막상 취업할 공장은 많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권유로 행정대학원에 입학하게 됐고, 마침 정부에서 행정고시 인원을 대폭 늘린다고 해서 행시를 보게 됐죠. 수석합격 후 ‘고시계’에 ‘이방인의 변’이란 합격기를 썼는데, ‘우리나라 공업 행정을 바꿔보겠다’는 마음에 도서실 한구석에서 생전 처음 행정법을 읽던 때부터 써내려간 글이었죠. 그걸 보고 많은 공대 후배들이 행정고시를 쳤어요. 한때 산업통상자원부 내 서울대 공대 출신 사무관이 법대, 상대보다 많은 80여 명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산업부는 주로 인허가를 하는 규제행정 부처였는데, 공대 졸업생들이 중추를 이루면서 산업정책이 규제에서 기술행정으로 바뀌게 됐죠. 오늘날 반도체나 HDTV, 차세대 자동차 등 첨단 기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 수십 년에 걸쳐 산자부 장관,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LG상사 부회장, 무역협회 회장, 경총 회장, 서울산업대 총장 등을 역임하셨어요. 대부분 사람은 하나도 하기 힘든 직책들이니 부러움과 시기의 목소리도 따릅니다. 공적 자리가 주어질 때 피하는 것도,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라고 로마의 현인 세네카는 말했습니다. 여러 직책을 맡게 된 배경과 마음가짐이 있었다면요.
“대부분 내가 원했다기보다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맡은 자리였어요. 산업부 차관을 끝으로 공직을 떠나면서 ‘다시는 과천 땅에 오지 않겠다’고 이임사를 했습니다. 마침 여러 기업에서 제의가 와서 민간인으로 새 출발 하려고 했는데, 법상 산업부 차관은 민간기업에 갈 수가 없었어요. 결국 ‘낙하산’으로 생산성본부 회장이 됐다가 서울산업대 총장으로 선출됐죠. 취임하자마자 소위 ‘부안사태’로 원전폐기물 부지 문제가 국가적 이슈가 돼 장관으로 명을 받았습니다. 2년 3개월 가까운 재임 기간 경주에 원전폐기물 부지를 결정하고 무역협회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등을 거쳤어요. LG상사에서 부회장과 고문을 하는 동안 평창올림픽 위원장에 선임된 것도 언론보도를 통해 알았죠. 한 가지 비결이라면, 매번 ‘마지막 봉사’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할까요.”

-동창회장 맡으시기 직전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아 잘 치러내셨죠. 인근 국가에서 잇달아 열린 올림픽과 비교해 감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조양호 전임 위원장 사퇴 후 대타로 차출됐습니다. 올림픽을 불과 1년 10개월 앞두고 악조건이 가득했어요.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연이은 미사일 발사, 국내에선 소위 최순실 게이트와 6000억원에 이르는 적자가 예상돼 있었죠. 하지만 끝난 후엔 전 국민의 84%가 “평창올림픽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프란치스코 교황도 격찬해 주셨고요.
도쿄올림픽이 1년 연기 후 무관중 개최됐고, 베이징 동계올림픽도 미국 등의 정치적 보이콧 속에 개최된 데 비하면 평창은 하늘이 도와준 올림픽이었다 싶어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한 덕분 같습니다.”

-매번 지금 직책을 ‘마지막 봉사’라 생각하셨다고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퇴계 이황은 69세에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안동에 내려가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저도 평창올림픽을 끝으로 낙향해 전원생활을 즐기려 했어요. 마침 안동에 경북도청이 이전해 오면서 경북문화재단을 설립했는데, 초대 대표를 맡아 우리 민족 역사의 뿌리와 통일신라의 문화를 간직한 경북에서 K-컬처를 선도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올해 9월 30일부터 10월 23일까지 영주에서 세계풍기인삼엑스포가 열립니다. 1541년 주세붕 군수가 재배하면서 시작된 풍기인삼은 소백산과 낙동강 자연 속에서 최상의 건강식품으로 자리매김했어요. 식용뿐 아니라 화장품, 의약품, 음료 등 다양하게 활용됨을 보여주고 싶어요.”

-다시 총동창회 얘기로 돌아가면, 서울대총동창회도 21세기형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반세기 이상 선배님들이 훌륭하게 해오셨지만, 세상이 바뀌었고 동문들의 행동과 사고방식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런 대전환기에 후임 동창회장에게 당부 겸 조언을 들려 주신다면.
“차기 회장으로 김종섭 스페코·삼익악기 그룹 회장이 추대됐습니다. 기업인뿐만 아니라 사회사업가로, 또 서울대인으로서 존경받는 분이죠. 동창회에 조찬포럼과 각종 행사를 벌여 놓아 기업경영을 하면서 모든 일을 수행하기는 벅찰지도 모릅니다. 가급적 부문별 책임자를 선임해 업무부담을 나눠 갖는 게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또 한 가지는, 지난 2년간 팬데믹으로 사람을 만나는 데 제약이 있었어요. 후임 회장님은 지방에 계신 동창들과 미국, 일본, 호주 등 해외에 계신 동창들과도 자주 어울려 지방지부와 해외지부를 활성화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국립 서울대’ 동문이 뭉치면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정치권에선 수시로 서울대 해체론도 나오고요. 일본 도쿄대가 10여 년 전에야 총동창회를 결성한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만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말처럼 동문의 역할이 큰 것도 사실이죠. 마침 모교 출신 대통령도 당선됐습니다. 기대와 우려를 직시하며 마지막으로 동문에게 당부 말씀을 해 주시죠.
“저출산·고령화가 지속되면서 지방이 무너진다는 게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서울 일부 대학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방대는 정원미달에 취직난까지 겹쳐 아우성치는 형국이죠. 대한민국 지도자로서 서울대인들이 내 문제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문제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난 2월 총동창회 신년회에서 김부겸 국무총리가 ‘서울대 졸업장은 특권이 아닌 책임의 상징’이라고 했지요. 리더의 필수 덕목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이고, 동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권위를 세우는 게 아니라, 모범을 보이고 스스로 희생도 감수하는 리더가 되라고요. 그 고언을 우리 모두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