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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호 2022년 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는다”

이순재 (철학54-58) 배우·가천대 석좌교수

원로에게 듣는다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는다”

이순재  (철학54-58) 배우·가천대 석좌교수



87세 최고령으로 3시간짜리 리어왕 31회 공연
자다가도 대사 나오게 석달 전부터 외워
“리더는 밑바닥 사람들과 어울리고 돌봐야 ”
리어왕이 참회하는 장면 깊은 인상  


“공연 석 달 전부터 대본을 외우기 시작했어요. 자다가도 찌르면 대사가 나올 수 있게요. 애드리브가 불가능한 작품이라 중간에 막히면 방법이 없거든요. 나이가 있어 걱정했는데 무사히 끝내서 천만다행이에요.”

연기 경력 65년 이순재 동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올해 나이 87세. 국내 현역 배우 중 최고령으로 꼽히는 그는 지난 연말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연극 ‘리어왕’ 공연을 마쳤다. 서울대 동문 극단인 관악극회 창단 10주년 기념공연이었다. 예정됐던 23회 공연을 전석 매진으로 마무리한 뒤 앙코르 공연 8회까지 추가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가감없이 그대로 살리면서 러닝타임은 3시간을 넘겼다. 그런 대작 공연을 총 31회 교체 배우 없이 원캐스팅으로 소화해낸 그를 1월 24일 만났다.   


-체력적·정신적으로 강행군이었을 것 같습니다.  
“끝나니까 좀 힘들더라고요.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장면이 많아서 다리도 당기고 근육통도 생기고 그랬어요. 말년에 필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하는 건데 욕먹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름대로 준비를 길게 했어요. 중간중간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을 해야 했는데, 되도록 그쪽 시간을 줄이고 늘 대본을 들고 다니며 연습했죠. 나로서는 주연으로 무대에 선 거의 마지막 연극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욕심을 내서 한다 해도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정도 아니겠나 싶고요.” 

-코로나19 와중이었는데도 전석 매진 기록을 세웠습니다. 
“작품이 좋으면 관객은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 젊었을 땐 사회적 여건 때문에 극장에 주부들이 거의 올 수 없었어요. 요즘엔 관객 60~80%가 여성이지요. 젊은이들도 많아요. 어려운 작품도 많이 보러 와요. 우리나라 관객들은 고전을 원작 그대로 다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연출가들이 현대화시킨다며 작품을 압축하고 뒤집어 버린 거죠.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진수는 원작의 문학 그 자체에 있어요.” 

그는 ‘리어왕’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를 리어왕이 폭풍우를 맞으며 참회하는 장면에서 찾았다. “리더는 밑바닥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고 돌봐야 한다는 자각을 담은 대사”라면서다. 연극 막을 내린 지 두 달 가까이 지났는데도 그는 그 대사를 줄줄 외워 들려줬다. 

“이 잔인한 폭풍을 견디고 있을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이여. 머리를 눕힐 집 한 칸 없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구멍 뚫린 누더기를 걸치고, 어찌 이 험한 날씨를 감당하려 하느냐. 나는 그동안 너무나 무관심했다. 부자들이여, 가난한 자의 고통을 직접 겪어봐라. 그리고 넘쳐나는 것들을 그들과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하자.”   

-양극화가 심화되고 혐오와 갈등이 횡행하는 지금 이 시대에도 필요한 메시지네요. 
“누군가는 ‘리어왕’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죽기 전에 절대로 자식들한테 재산 나눠주지 마라’ 아니냐고 하던데요(웃음).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그러니까 영국이 최고로 번성할 때 활동했던 작가예요. 귀족 사회와 서민 사회의 격차를 바라보며 느끼는 회한이 작품마다 들어가 있습니다. ‘한여름밤의 꿈’에서도 귀족과 시정잡배들이 함께 어울리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말하지요. 이는 시대와 국적과 이념을 초월해서 몇백년 동안 유지돼온 가치이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예요.”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조부모가 사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 자랐다. 서울고에 입학했지만 그 해 6·25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피난지의 대전고에서 청강생으로 학업을 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황금기를 날려버렸다”는 아쉬움이 컸던 만큼 대학 생활을 열심히 했다. 

“당시 철학과에 정교수가 다섯 분이었어요. 우리나라 철학의 대가가 다 계셨죠. 칸트 철학의 대가 고형곤 박사가 과 주임교수셨고, 헤겔 철학의 최고 권위자 박종홍 교수, 교육 철학의 이인기 교수, 서양 철학의 박홍규 교수…. 아, 내가 이분들 체취만 4년 열심히 맡고 나가도 되겠다 싶었어요.”

그는 대학 1학년 때의 철학 개론 수업 시간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묘사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고형곤 교수님이 소주 한 잔 걸치고 모자 쓴 채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동숭동엔 세 가지 대표적인 나무가 있어요. 마로니에, 은행나무, 라일락. 5월이면 라일락 향기가 좋아요. 교수님이 ‘저 밖을 좀 내다봐라’ 그러세요. ‘저 라일락 꽃잎이 무슨 색깔이지?’ ‘파란색이요’ ‘그래? 근데 다시 잘 보라고. 직사광선을 받는 부분은 하얗게 보이지 않나? 그리고 햇빛 안 받은 곳은 까맣게 보이는데. 그럼 진짜 파란색 맞는 건가?’ 이렇게 철학이란 학문은 모든 걸 의심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셨어요. 멋쟁이셨죠.”



대담·글 : 이지영(약학89-93) 중앙일보 문화팀장


배우라는 평생의 업(業)도 대학 시절 찾았다. 취미로 보기 시작한 영화가 그 출발이었고, 철학과 후배 김의경과 함께 재건한 서울대 연극회가 그의 데뷔 무대를 열었다. 대학 3학년 때인 1956년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로 연기를 시작했다. 연극회 회장을 맡았던 4학년 때는 영국 작가 테렌스 래티건의 1946년 작 ‘윈슬로가의 소년’을 한국 초연하면서 대사관을 통해 작가에게 직접 연락, 11달러의 저작권료를 주고 정식 공연 계약을 하기도 했다.   

-배우를 ‘딴따라’라며 평가절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떤 매력이 배우의 길로 끌어당겼나요. 

“1950년대에 이탈리아·프랑스·영국·미국 등 세계 각국의 예술영화들이 막 쏟아져 들어왔어요. 당시엔 영화관에 좌석제가 없었는데, 한 번 자리를 잡아놓고 나면 하루종일 볼 수 있었어요. 영화를 보면서 세계 최고 배우들의 연기를 간접적으로 배운 셈이죠. 특히 영국 왕실에서 ‘경(Sir)’ 작위까지 받은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 연기를 보면서 이거야말로 예술적 창조행위구나, 감탄했어요. 남들이 예술가로 인정을 하든 안 하든 나도 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또 배우로 무대에 서면서 느끼는 관객과의 교감, 자기가 아닌 다른 새로운 인물들의 인생을 사는 경험 등도 상당히 매력 있습니다.” 

그의 본격적인 프로 배우 활동은 군 제대 후인 1961년 시작됐다. 드라마센터로 이해랑 선생을 찾아가 “배역 하나 주십시오” 하며 따낸 배역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친구 역이었다. 연극배우로는 돈을 벌 수 없는 시대였다. 그는 “1978년 ‘세일즈맨의 죽음’ 때 처음으로 연극 출연료를 받았다”고 했다. 1961년 KBS가 개국하면서 본격적인 TV 방송시대가 열렸고, 처음엔 ‘용돈벌이’로 시작한 드라마 연기로 그는 안방극장의 주역이 됐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등 K-컬처 바람이 세계 문화계의 화제입니다. 
“1960, 1970년대도 우리가 좀 용기를 갖고 세계에 도전했다면 평가를 받았을지 몰라요. 유현목·이만희·김수용·신상옥·김기영 감독 등은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때만 해도 ‘우리가 뭘…’ 하면서 스스로를 비하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이제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대중문화가 한국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중요한 요소가 됐지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우리보다 훨씬 역량이 뛰어납니다. 조건도 좋고요. 정부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섭은 하지 말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펀딩을 좀 해줘야 된다는 겁니다.” 

-지난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올해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은 오영수 등 원로배우들의 활약도 두드러집니다. 
“그동안 쭉 진솔하게 자기 연기를 해온 게 인정을 받은 거죠. 지난 60여 년을 돌아보면 수백명의 남녀 주인공이 TV 브라운관 앞을 지나갔어요. 반짝반짝 톱스타로 뛰었던 친구들이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더하고 더 더 공부하고 해서 지금 유지하고 있는 거죠. 연기란 게 완성 단계가 있는 게 아니거든요.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계속 새로운 창조를 해야 생명력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의 연기인생에서 잠깐 ‘외도’가 있었다면, 정치에 몸 담았던 시기다. 1988년부터 꼭 8년 동안이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 지역구에 출마해 750여 표 차이로 석패했고, 4년간 절치부심 지역구를 다져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15대 선거 때 불출마 선언을 하며 다시 연기자로 돌아왔다.   

-정치는 왜 그만두셨나요.  
“15대 총선 때 나이가 딱 예순이었죠. 그 이전 8년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꽃의 아름다움, 하늘의 푸르름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요. 명색이 여당이니까 어느 집 불난 거, 물난리 난 거 이게 다 내 책임이거든요. 국회의원을 제대로 하려면 본인과 가족의 행복권을 다 포기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통령 하려면 사돈의 팔촌까지 행복권을 포기해야 되겠지요.” 

-대통령 선거가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일까요.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는 게 리더십의 주목적입니다. 지지세력만의 리더가 아닌 전체의 리더가 돼야 하죠. 내 편만 갖고 하겠다면 절반은 버리겠다는 얘기예요. 그건 통치술이 아니죠. 또 리더는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돼요. 대통령의 권력을 자기 권력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요. 직책을 완전하게 수행하기 위한 ‘편의 제공 차원의 권리’라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2시간 가량 인터뷰 내내 그의 대답은 마치 한 편의 공연처럼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 특유의 형형한 눈빛도 한결같았다.   

-건강관리 비법이 있으신가요.
“배우란 직업이 고민 많은 직종이 아니잖아요. 자기 자신의 어떤 성과를 위해 노력만 하면 되는 거지, 여기저기 얽혀 복잡할 일이 없죠. 배역 욕심이 있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 다음 배역을 해도 상관 없어요. 열심히 하면 다 평가받는 거니까요. 조금 인생을 손해본 듯 생각하고 사는 게 편해요. 그러면 우선 적이 없어요. 그게 건강비법이에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뭐 그냥 기다렸다가 드라마 찍고 그러는 거죠. ‘리어왕’을 다시 한 번 해볼 생각도 있고요. 또 연극 연출도 한 번 하려고 합니다.” 


이순재 동문은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서울고를 졸업했다. 피난 시절 본 연극에 감명을 받아 모교 철학과 3년 때부터 연기에 몰두했다. 재학시절 단대별로 흩어진 연극부를 통합해 서울대 연극회를 창설했고 1956년 ‘지평선 너머’로 정식 데뷔했다. tvN 예능 ‘꽃보다 할배’를 비롯해 연극 ‘황금연못’ ‘리어왕’ 등에 출연하며 87세의 나이에도 청년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연기자협회 초대 회장, 제14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가천대 석좌교수로 학생들의 연기를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