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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호 2021년 5월] 뉴스 본회소식

수요특강: 공정한 법치가 경제 활력 밑거름

정병석 한양대 석좌교수

공정한 법치가 경제 활력 밑거름

정병석 무역72-76
한양대 석좌교수 수요특강



법 제도에 못 미친 문화 수준
지도층 솔선수범으로 올려야



정병석(무역72-76) 한양대 석좌교수가 4월 28일 본회 수요특강 연단에 섰다. 2004년 노동부 차관, 2006년 한국기술교육대 총장을 역임한 후 최근 삼성물산 이사회 의장에 선임된 그는 관·학·재계를 두루 섭렵한 오피니언 리더로 꼽힌다. 2016년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를 출간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 정병석 동문이 올해 초 ‘대한민국은 왜 무너지는가’를 펴냈다. ‘신뢰와 법치 사회 구현’을 주제로 한 이날 강연은 정 동문의 두 책을 요약해 우리 사회의 병폐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국가의 시스템은 공식화된 법 제도를 통해 ‘하드웨어’적인 뼈대를 세우고 비공식적인 사회문화 혹은 사회규범을 ‘소프트웨어’로 하여 운영됩니다. 제도와 문화가 상호보완적으로 어우러지는 나라가 소위 말하는 선진국이죠. 우리나라 법 제도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많은 개발도상국이 배우려고 해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2019년 한국법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40%에 육박하는 국민이 ‘법치가 구현되는가’ 묻는 질문에 부정 답변을 했습니다.”

정 동문은 대학교수가 가짜 인턴 증명서를 발급하고 LH 직원이 직무상 알게 된 기밀을 이용해 땅 투기를 하는 등 사회지도층과 공직자부터 반칙을 일삼으니 “나도 원칙을 안 지키지만, 상대가 지킨다는 믿음도 없고, 그러니 서로 안 지키게 된다”고 꼬집었다. ‘게임의 룰’을 신뢰하지 않으므로 근로 의욕도 떨어지고 불만이 쌓인다. 양반과 평민을 나눠 이중잣대를 적용한 조선시대 향약이 경제의 활력을 앗아간 것과 비슷하다.

“양반이 제정한 지방 자치 규약인 향약은 똑같은 죄를 지어도 신분에 따라 다르게 처벌했습니다. 양반에겐 훈방으로 그치는 죄목도 평민에겐 장형으로 다스릴 만큼 가혹했죠.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니, 백성은 가난해도 일하지 않고 더러워도 씻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여행작가 이사벨라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청일전쟁 전후 무렵의 조선을 돌아보고 “구제불능의 나라”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중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연해주 자치구에 와선 생각을 바꿉니다. 조선인이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부자로 살고 있었던 거예요. 탐관오리 없이 공정한 법 집행이 이뤄지니 열심히 열심히 일했던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엔 이러한 사회적 신뢰의 회복이 절실합니다.”

정 동문은 불신과 함께 혐오를 대한민국 쇠망 우려의 요인으로 꼽았다.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관점을 가진 정치 세력을 적대시할 뿐 아니라 이를 부추기는 가짜 정보의 범람과 확증편향이 갈등과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 개인의 취향에 따라 맞춤형 콘텐츠 제공이 가능한 디지털 플랫폼 시대의 부작용이기도 하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프레임으로 통치했습니다. 관용과 절제의 미덕을 저버리고 거짓 또는 오도의 소지가 다분한 주장을 연일 퍼부었어요. 그런데도 강성 지지자들은 트럼프에 열광했습니다. 재선에 실패했지만 많은 표를 받았고요. 전체주의 전문가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체제 형성과정과 특징을 분석하면서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도 전체주의가 출현할 수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커요.”

난제를 쏟아냈지만, 해법은 명료했다. 상식에 기초한 법치와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그것이었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 등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훌륭한 국가의 덕목을 그대로 지도층에 요구되는 덕목으로 제시하면서 정 동문은 특히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지식인이 타인의 의견을 포용하면서 용기 있게 소신을 밝혀야 정치권의 각성을 촉구할 수 있다는 것. 그 예로 학자·정치인·기업인·시민 지도자가 함께 지역 사회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모임 ‘사와로(saguaro) 세미나’를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 교수가 주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나라마다 조금씩 달라서 한 손엔 칼 또는 책을 들기도 하고, 왼손 혹은 오른손에 들리기도 하지만, 정의의 여신상은 어느 나라든 공통적으로 천칭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 대법원도 마찬가지고요. 일반인에게도 법이 너무 어려워선 안 되며 재산이나 권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공정하고 엄정하게 법이 집행될 때 무너진 우리 사회의 신뢰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본회는 이날 참석한 동문 전원에게 정병석 동문의 책 ‘대한민국은 왜 무너지는가’를 증정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