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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2020년 4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뭐든 다 알고 있는 AI, 인간의 의식은 없지요”

70세에 뇌과학 박사학위 받은 김재익 동문

“뭐든 다 알고 있는 AI, 인간의 의식은 없지요”

70세에 뇌과학 박사학위 받은 김재익(섬유공학69-75) 동문




5년 집필 끝 의식 서적 출간
손에서 책 놓지 않는 독서광


공학을 전공하고 ‘육체를 떠난 의식, 영혼 같은 건 헛소리’라 치부했던 사람이 의식을 주제로 오랜 연구 끝에 두꺼운 책을 펴냈다. 그것도 고희를 눈앞에 두고. 의식을 연구하기 위해 30년 전 졸업한 대학에 다시 들어가 뇌과학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지난 2월 ‘의식, 뇌의 마지막 신비’를 출간한 김재익(섬유공학69-75·협동과학 뇌과학전공 박사) 동문이다.

3월 30일 효창동 효창공원에서 만난 그는 “평생 책을 손에 놓지 않은 것”이 의식에 대한 관심과 만학의 불씨를 당겼다고 말했다. 경남공고와 모교 졸업 후 제일모직 등에서 의류기획자로 해외를 오가며 일했고 현재 의류 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공대 재학 시절 물리 교양수업을 들은 것을 계기로 꾸준히 천문학 등 과학 서적을 탐독해왔다. 철학과 정치학까지 관심을 넓히다 우연히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 ‘티베트 사자의 서’ 등의 책을 접했다.

“임사 체험과 사후 세계에 대한 서술이 아주 유사해 우연의 일치 치곤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육체와 분리된 의식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가 읽은 책들은 과학적인 근거 없이 신비한 경험을 서술하는 데 그쳤다. 과학에서는 의식을 어떻게 생각하고, 누가 연구하는지 궁금해 심리학과 신경과학, 뇌과학 책을 섭렵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체계적인 연구가 절실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텝스까지 쳐가며 모교 대학원 뇌과학 협동과정에 지원한 이유다. “젊은이들의 기회를 뺏는 건 아닌가 고민도 했지만 나이 들어 공부할 정도로 이공계가 재밌다는 걸 후학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뇌의 가소성과 노화’를 주제로 SCI 저널에 논문을 싣고, 박사논문을 제출한 뒤 숨 돌릴 틈 없이 ‘의식, 뇌의 마지막 신비’ 집필에 들어갔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홀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 꼬박 5년이 걸렸다. 200여 개의 참고문헌을 일일이 찾아 정리하고, 독학으로 그래픽 프로그램을 배워 책에 삽입될 이미지도 직접 그렸다. 그 결과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의식과학을 아우르는 책이 탄생했다. 의식을 둘러싼 논쟁과 의식과학의 역사, 동물과 인간의 의식 등을 차례로 다루며 누군가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단정하는 주제를 과학의 눈으로 바라보고 설명하려 노력한 티가 난다.

“의식은 많은 분야에서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과학에선 의식이 뇌의 작용에 따른 산물이라고 보지만 종교계나 철학계에선 의식이 물리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특질과 속성을 띤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죠. 의식이 인간에게만 있냐는 것도 오랜 논쟁거리예요.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책 쓰는 걸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사람들과 대화해 보니 의외로 의식에 관심이 많다는 걸 깨닫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책을 쓰면서 그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1% 정도 여지를 남겨놨다고 했다. 과학자가 아닌 개인으로선 더 많은 의문이 있다. 현대의 의식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것이다. 자신은 “복잡한 뇌구조에서 의식이 ‘창발’했지만 언젠가는 신경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리라 믿는 입장”이라고 했다.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특성만으론 전체를 설명할 수 없을 때 ‘창발’이라고 한다.

“시각 피질과 하측두엽의 동시적 신경 발화라는 물리적 사건이 어떻게 ‘낯익은 사람의 얼굴’이라는 의식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이 ‘설명적 갭’을 과학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영혼이 있다, 없다를 단언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아인슈타인 이전엔 중력에 의해 공간이 휜다는 걸 아무도 생각 못 했잖아요. 의식과학에서도 그런 천재가 나와 의식 문제의 해답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의식 탐구에 종교적 영향이나 고뇌는 없었을까.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아내가 크리스천이에요. 책을 준비하면서 ‘종의 기원’을 쓴 다윈 이야기를 나눴죠. 대표적인 무신론자 다윈도 책을 쓸 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 때문에 많이 망설였다고 해요. 다윈의 아내처럼 ‘당신이 과학자로서 쓰는 걸 내가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이해해 주더군요. 고마운 마음에 아내 따라 교회에 나가고는 있어요(웃음).”

그는 “컴퓨터가 뭐든지 다 해주는 미래엔 머리 쓸 일이 줄어드니 인간의 의식 수준은 낮아질 가능성이 많다”면서 “앞으로 인류가 교육과 여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렸다”고 했다. 지금도 김 동문의 일상 중 7할은 독서가 차지한다. 뇌과학자 펜필드의 전기를 원서로 읽고 있고 칸트 전집을 독파 중이다.

“학부 시절 집안이 어려워 고학을 했어요. 막막함에 당시 지도교수와 학과장님을 찾아가 장학금을 주시면 어떻게든 성적을 올려 체면을 세워 드리겠다고 읍소했지요. 당시로선 큰 액수의 장학금을 알아봐주셨고 이후 거의 올A를 받았습니다. 훗날 대학원 가는 데 그 성적이 큰 역할을 했어요. 책을 보내드렸더니 전화를 주셨어요. ‘자네 힘든 일 했네, 내 제자라는 게 자랑스럽다’는 말에 빚진 감정이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았습니다.”

17살 많은 제자를 성심껏 지도해준 최진영(심리83-87) 심리학과 교수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인 김언호(신대원68-77) 한길사 대표에게도 고마움을 돌렸다. “박사 시작할 때부터 김 대표가 책을 내자고 권유했어요. 그 사이 출판계가 어려워져 ‘100권은 팔리겠나’ 내심 걱정하더니, 한 달 만에 재판을 찍어서 놀라더군요.”

‘결국 의식에 대한 관심은 영생에 대한 바람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물음을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의식을 다뤄 유명해진 책들도 말년의 저작이 많다. “출판사에서 살펴보니 60대 이상이 제 책을 많이 샀다고 해요. 저도 그렇지만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 오면 또 다른 인생이 있는지 궁금해지지 않겠어요. 조현병이나 치매와 달리 의식 연구는 당장 시급하지 않아 여유 있는 원로들이 몰두한 것도 있고요.”

요즘 관심이 커진 AI의 의식에 대해서는 “아직 인간 의식 연구도 부족한 데다 AI는 유기체로서 끊임없이 신경계가 변화해 만드는 인간의 의식을 구현하긴 힘들다고 보지만, 젊은 연구자들이 이 책으로 인해 의식에 흥미가 커지길 바란다”고 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