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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호 2019년 5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빨리빨리 문화의 빛과 그림자

김광덕 정치82-86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느티나무 광장

김광덕 논설위원



‘한국 사회의 특성을 한두 마디로 요약하면 어떻게 될까.’ 미국에서 2년간 해외 연수를 했던 국회사무처 직원이 정리한 ‘장님 코끼리 잡기식 미국 체험기’ 메모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직원은 미국 사회의 특징을 20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건국 역사가 250년에도 미치지 못한 미국은 사소한 것도 모두 기록하면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나라’라고 규정했다. 이어 국토 면적이 세계에서 세 번째인데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점을 들어 ‘축복 받은 나라’라고 소개했다. 이와 함께 ‘정(情)이 없다’ ‘질서가 있다’ ‘물가가 싸다’ ‘엘리트가 지배하는 나라’ ‘약자를 배려하는 나라’ ‘쿠폰의 나라’ ‘가정 우선의 나라’ ‘무서운 경찰’ ‘안전을 최우선’ ‘참전 용사 존경’ 등이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었다.


전문가들은 미국 사회 특징을 ‘멜팅팟’(Melting Pot)이란 단어로 요약한다. ‘용광로’란 뜻이다. 다양한 인종·민족·문화가 용광로에서 녹아 어우러져 하나의 ‘아메리카 합중국’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미국 민주주의는 여러 갈래 갈등과 대립을 녹이면서 숙성돼왔다. 하지만 최근 수년 사이에 인종과 정파·이념 대립이 극대화되면서 멜팅팟 기능이 고장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일본 사회의 성격을 규정한 대표적인 책은 ‘국화와 칼’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1887~1948)가 미국 국무부로부터 의뢰받아 쓴 것으로, 일본을 가장 잘 묘사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국화는 평화를, 칼은 전쟁을 상징한다. 베네딕트가 본 일본인은 손에는 아름다운 국화를 들고 있지만, 허리에는 차가운 칼을 찬 사람이었다. 이 같은 일본의 이중성과 모순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면서 군국주의 부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외국 학자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해방 이후 두 차례 한국에 머물렀던 미국 외교관이자 정치학자인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이 한국 정치와 사회를 해석하는 키워드는 ‘소용돌이(Vortex) 현상’이었다. 헨더슨은 조선시대 이후 박정희정권까지 분석한 뒤 1968년에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라는 책을 펴냈다. 여기서 소용돌이란 고도의 동질화와 중앙집중화 현상 때문에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와 개체들이 태풍의 눈인 권력 중심을 향해 돌진하는 사회·정치적 상승 기류를 비유한 것이다. 동질성, 중앙집권, 단일한 역사·문화적 경험 등은 근대화를 위한 힘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여러 문제를 유발하는 근원이 되었다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했다. 소용돌이 정치 유산은 요즘 ‘제왕적 대통령제’와 ‘여야의 무한 대립’이라는 병적 현상을 낳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헨더슨은 한국 사회에서는 ‘다원화를 통한 응집(cohesion)’이 적절한 처방이라고 제시한다.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갈등 조정과 국민 통합을 추진하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필자는 헨더슨의 분석에 덧붙여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특징으로 소용돌이와 연관된 ‘빨리빨리’ 문화를 지적하고 싶다. 오죽했으면 외국의 관광지에서도 ‘빨리빨리’라는 한국말을 알 정도이겠는가. 한국 관광객들이 현지에서 식사나 쇼핑을 할 때 이 말을 워낙 자주 쓰기 때문이다. 소용돌이와 스피드 문화가 중첩된 게 우리 사회의 특징이다. 지난 4월 말 전 세계에서 동시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이 한국에서 관객 동원 신기록을 기록한 것도 우리 사회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무선 인터넷 속도가 세계 최고인 것도 유사한 현상이다. ‘소용돌이’와 ‘빨리빨리’ 문화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적 분열, 성과 집착 등 많은 후유증도 남겼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뿌리내리게 하려면 다원화와 통합 외에 속도 조절도 적절히 배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