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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호 2018년 5월] 문화 작가의 정원

작가의 정원 <5> 영화감독 데릭저먼의 프로스펙트 코티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위로해준 정원


영화감독 데릭저먼의 프로스펙트 코티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위로해준 정원

내가 이 해안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2~3명이 자갈밭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 정원은 입장료를 내거나 개장 시간을 걱정 안 해도 된다. 해안가 도로에서 노란 창틀이 있는 검은 오두막집이 덩그러니 보인다. 정원은 울타리 없이 자갈밭 위에 듬성듬성 키 작은 초화류가 있다. 그리고 자갈밭과 겹쳐지는 긴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 멀리까지 수평선이 펼쳐진다. 그 바다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있는 도버해협이다. 이곳은 런던에서 남동 방향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켄트주의 던지니스(Dungeness)라는 작은 어촌 마을이다.

이 정원의 디자이너는 데릭 저먼(Derek Jarman:1942-1994)이다. 그는 화가이자 설치 미술가 그리고 영국 영화계의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고 작가이다. 그는 동성애 지지자이며 에이즈 환자로 짧은 인생을 마친다. 그는 영화 촬영 장소를 물색하던 중 외딴 바닷가에서 어부의 낡은 집을 발견한다. 이곳에서 영화 ‘더 가든(The Garden)’을 촬영한 후, 병세가 악화되어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 프로스펙트 코티지로 이주하여 그의 나머지 생을 보내게 된다. 그는 단 한 곳의 정원을 디자인하고 가꾸었다. 그리고 그의 정원은 정원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물론 17세기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정원을 디자인한 정원사 르 노트르(Andre Le Notre:1613-1700) 시대에도 정원은 예술적 가치가 있었지만 왕이나 귀족 등 특수한 계층의 소유물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유럽에서는 시민 혁명, 식민지 개척, 산업혁명 등으로 중산층이 형성되고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정원은 시민들의 관심과 대중적인 취미 생활로 발전하게 된다. 더욱이 예술가들은 정원을 하나의 화폭으로 생각하고 정원에 자신의 예술 감각을 표현하면서 정원 디자인은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데릭 저먼의 정원에는 울타리가 없고 주변 바닷가에 있는 작은 자갈들이 경계 없이 깔려있다. 어부가 살았던 오두막집은 덩그러니 자갈밭 위에 놓여있다. 벽에 둘러쳐진 검은 판자와 노란 창틀이 미묘한 대비 효과를 만들어 낸다. 정원을 장식하고 있는 조형물은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주변과 어우러진다. 하지만 이들은 저먼이 주변을 산책하며 주워온 것들이다. 그에게 바닷가에 버려진 물건들, 아니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이 남달랐으리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낚시 도구, 파도와 맨몸으로 부대꼈던 돌멩이와 조개껍데기 그리고 부유물로 떠다니다 바닷가에 안착한 나무 둥치들이다. 무대 장치와 설치 미술가였던 그는 이런 오브제를 정원에 드문드문 배치하였다. 자갈밭에 던져져 있는 녹슨 닻은 더 이상 항해를 하지 않아도 된다.

정원 식물 또한 단출하다. 꽃이 화려한 정원수와 다양한 초화류를 식재하는 영국의 정원 스타일인 ‘English Flower Garden’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정원에는 키 큰 나무가 한 그루도 없으며 대부분의 키 작은 초화류들로 해안가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이다. 야생 양귀비와 잉글리시 라벤더는 바닷바람에 적응하려는 듯 자신의 키를 낮추었다. 그리고 자갈밭 사이에서 드문드문 몸을 웅크린 채 자라고 있는 다육질의 갯배추(sea kale)의 잎새는 회색과 푸른빛을 띠고 있다.

데릭 저먼은 황량한 풍광과 수평선 너머까지 텅 빈 하늘 그리고 무심히 솟아나는 식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세계를 찾으려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는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며 이 정원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그 위로를 이해하고 싶은 듯하다. 그 위로에는 희망과 슬픔이 함께 했으리라. 그리고 그 색은 아마 푸른색일 것이다.

오늘 날씨는 흐리지만 나는 저먼이 원했던 푸른 하늘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2013년 프랑스의 쇼몽 가든 페스티벌에서 어느 정원 디자이너가 데릭 저먼을 추모하며 디자인한 정원이 기억난다. 그는 정원에 작은 자갈을 깔고 커다란 푸른 캔버스 천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아마 그는 저먼에게 푸른 하늘을 만들어 주고 싶었나 보다. 데릭 저먼은 이곳에서 그의 영화 ‘The Last of England(1987)’, ‘The Garden(1990)’ 등을 촬영하였다. 하나의 정원이 영화의 배경으로 나오고 작가가 글을 써서 이야기를 입히니 새롭게 태어난다. 마치 이 집의 이름이 프로스펙트 코티지(Prospect Cottage)인 것처럼.

글·사진 문현주(농가정74-78) 가든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