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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호 2023년 10월] 뉴스 본회소식

육지를 비집고 들어온 삽교천 따라 신앙도 들어왔다

국토문화기행


국토문화기행
육지를 비집고 들어온 삽교천 따라 신앙도 들어왔다


9월 21일 30여 동문이 본회 국토문화기행에 참여해 충남 내포 지역을 둘러봤다.  

내륙 깊은 해안선 덕 교류 활발
천주교 성지, 실패한 운하 흔적도


‘바다나 호수에서 육지 안쪽으로 들어간 포구, 갯가’를 뜻하는 일반명사 내포(內浦)를 고유 지명으로 가져간 곳이 있다. 충남 예산, 당진, 서산, 홍성, 태안까지 차령산맥 서북쪽을 아우르는 내포 지역이다. 지형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내포의 중심인 아산만 삽교천 하구는 국내에서 내륙 가장 깊숙이 바닷물을 찔러넣는 물길이다. 그야말로 가장 ‘내포다운 내포’. 9월 21일 국토문화기행은 내포의 지리적 특성을 곱씹으며 그에서 기인한 문화를 탐방하는 시간이었다.

내포는 과거 중국과 교류가 활발한 곳이었다.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천주교와 불교가 대표적이다. 충남 지역 천주교 전파에서 내포의 중요성은 1860년대 프랑스 선교사들이 그린 지도에 나타나 있다. 지도에는 ‘NAI-PO(내포)’를 상부와 하부로 구분해 주요 읍면까지 표시했다. 육지를 비집고 들어온 여기 바닷물처럼 사람들의 마음에도 새로운 신앙이 파고들길 바랐을 터다. 1890년 충남의 두 번째 성당 ‘공세리 성당’이 내포에 들어섰고 바티칸에 입성한 김대건 신부의 신앙도 내포에서 싹텄다.

안내와 해설을 맡은 이민부(지리교육74-78)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공세리에 과거 충청도 각지에서 조세로 걷은 쌀을 보관해 한양으로 운반하던 공세리 조창이 있었다”고 말했다. “간척 전 성당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공세곶으로 조운선이 드나들었다. 처음엔 노적을 하다 80칸의 창고를 지어 조창을 위한 성곽도 쌓았다”는 설명. 19세기 폐지된 조창 자리에 프랑스인 신부가 성당을 지었고 성곽은 마을에 일부 남았다. 성당을 이룬 적벽돌은 중국에서 굽고 중국 기술자들이 건너와 쌓은 것이다. 미사 중인 성당 바깥을 한 바퀴 조심스레 둘러보며 여기저기서 “아담하고, 예쁘다”는 감탄이 나왔다.

성당 축조를 돕던 마을의 젊은 신자 중 이명래가 있었다. 그는 신부에게 배운 프랑스의 본초학을 한약재에 결합해 ‘이명래 고약’을 만들었다. 처음 고약 가게를 연 공세리에 기념 벽이 남아 있다. “맞아, 우리 어릴 때 진짜 유명했지” 동문들은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워 했다.



공세리 성당


공세리에 있는 이명래 고약 관련 기념물


가톨릭에 앞서 불교 문화가 들어왔다. 내포 지역 백제 석불 3기 중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 마애불이 단연 유명하다. “백제 불교는 마을 단위로 불교 문화 유적을 개발했다. 바위가 작으면 작은 마애불을, 크면 큰 마애불을 만들고 기술이 부족해도 엉성한 대로 만들었다”는 이 교수의 말처럼, 가파른 계단을 올라 닿은 서산 마애불 역시 아담한 규모지만 오묘한 미감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았다. 마애불엔 앞바다를 오가는 선박의 안전을 비는 뜻도 깃들었다.

좋은 것만 들어온 것은 아니다. 물길 타고 빈번히 출몰하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지은 것이 해미읍성. 주요 군사거점이었던 이곳은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1790~1880년대를 거쳐 성지의 반열에 오른다. 해미읍성 옥사에 수감된 신자 1000여 명이 해미읍성 뜰의 회화나무에 철사줄로 머리가 매달려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한 서린 철사 자국 탓인지, 폭풍으로 부러져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아서인지, 높이는 뻗었어도 수세가 처연하다. 세례명을 가진 동문 몇몇이 “여기선 웃지 말자”며 나무를 배경으로 옅은 미소만 띄우고 사진을 찍었다.


서산 마애삼존불.


마지막으로 향한 굴포운하는 역사 속 뼈아픈 실패의 상징 같은 곳이다. ‘굴포’는 ‘육지를 굴착해 포구를 연결한다’는 뜻. 고려시대 전라도 곡창지대 쌀을 한양으로 운반하던 통로인 태안반도의 안흥량은 험난한 해로로 손꼽혔다. 험로를 피해 서산 가로림만부터 태안 천수만까지 운하를 뚫어보려던 공사가 고려 인종 때 첫삽을 떠 조선까지 지지부진 330년을 끌었다. 단단한 암반과 격한 조수차로 밀려드는 토사를 극복하지 못한 탓이다. 하 륜, 신숙주, 송시열 등 내로라하는 정승들이 책임자로 나섰지만 족족 실패했다.

미완성의 운하는 이내 잊혀지고, 태안 인평리에 길이가 짧은 저습지 형태로 남아 ‘굴포운하’라는 팻말과 그나마 주변보다 낮은 땅 높이가 운하를 판 흔적을 알릴 뿐이다. 일행 사이 현대인의 눈으로 “이걸 못 파나” 탄식하는 말, 무의미한 곡괭이질에 지쳐갔을 인부들을 헤아리는 말들이 오갔다. 씁쓸한 기분으로 돌아보고 나오는 발밑에 실패의 기억처럼 떨쳐내기 어려운 진흙만이 잔뜩 묻었다.



태안 굴포운하 터


내포라는 이름과 함께 일찍이 새로운 문물들이 들어와 중첩되고, 주요 길목으로 각광받았다. 그와 동시에 무수한 희생과 침입의 역사도 함께 가져야 했다. ‘땅의 성격을 알고, 역사를 익히고, 그 속의 사람들을 본다’는 국토문화기행의 취지가 빛났던 내포 여행은 아산만에 노을이 질 무렵 마무리됐다.

본회 국토문화기행은 연 2회 봄가을에 진행된다. 이민부 교수의 안내로 지금까지 6차 기행을 마쳤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