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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호 2022년 6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피란민 10만명 목숨 살린 증조부 결정, 제 운명도 바꿔놨죠”

벤 포니 흥남철수 영웅 ‘포니 대령’ 증손자

“피란민 10만명 목숨 살린 증조부 결정, 제 운명도 바꿔놨죠”


벤 포니 (국제대학원14-16) 
흥남철수 영웅 ‘포니 대령’ 증손자



피란민 후손 만나며 역사 알려
모교에서 한미외교정책 연구 


“좀 닮은 것 같은데요?” “하하, 그런가요?” 

태어나기도 전 작고한 증조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던 청년은 미소를 띄웠다. 사진 속 늠름한 군인은 고 에드워드 포니 대령(Edward H. Forney), 청년은 그의 증손자 벤자민 에드워드 포니(이하 벤 포니) 동문이다. 포니 대령은 ‘흥남철수 영웅’으로 잘 알려졌다. 상륙과 탑재 전문가인 그는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중공군을 피해 철수하던 미군이 피란민 10만명을 배에 함께 태우고 가기로 결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2009년 한국에 온 벤 포니 동문은 ‘영웅의 후손’으로 큰 환대를 받았다. 흥남철수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했을 무렵엔 모교 국제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공부하면서 흥남철수의 역사를 알리기 바빴다. 그런 그가 이제는 “나도 증조할아버지처럼 세상에 기여할 일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집 근처인 용산 전쟁기념관 내 카페에서 5월 27일 만났다. 

“증조할아버지가 1957년부터 2년간 미군으로 살았던 용산에 내가 살고 있단 게 신기해요.” 유창한 한국어였다. “평생 군인이었던 증조할아버지는 가족과 많은 얘길 나누지 못하셨어요.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에서 싸웠고, 한국에 주둔했고, 1965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베트남에서 일할 준비를 하고 계셨죠. 1998년 저의 아버지가 흥남철수작전 통역관이셨던 현봉학 박사님을 우연히 만나면서 우리 가족은 흥남철수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현봉학 박사에게 포니 대령은 친구이자 은인이었다. “흥남철수 작전 지휘관인 아몬드 장군을 나와 함께 설득해주고, 매일 선적 배치를 다시 짜며 기적처럼 승선 인원을 늘려 갔다”. 그가 들려준 얘기가 포니 가족의 운명의 지침을 바꿔놨다. “13세 때 현 박사님을 만나고 온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가족의 역사가 궁금하기도 했고요.”

작가를 꿈꾸며 영문학을 전공했던 벤 포니 동문은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한국에 들어와 목포에서 원어민 교사로 영어를 가르치며 피란민의 후손들을 만났다. 아버지 네드 포니씨도 한국에 들어와 흥남 철수에 대한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은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영감을 얻었다. “동아시아 평화와 한미 관계 강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목표도 생겼다. 모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게 된 이유다. 참전용사 후손 장학생이기도 했지만 피란민의 후손들도 십시일반 장학금을 모아 줬다. 민간 외교안보 연구소인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일했고, 지금은 모교 박사과정에서 한미 외교정책 결정 과정을 연구 중이다. “한미 동맹으로 연결된 한국과 미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외교적 의견을 모으고, 불일치를 해결하는지 살펴보고 있다”고 했다.   

여러 모로 격변하는 외교안보와 대북 관계를 보는 시선이 남다르겠다는 물음에 그는 다소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평소 낙관적인 편이지만, 김정은 정권 교체는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통일은 좋지만 급하게 진행하면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김씨 가족 정권은 오랜 군사적 도발, 외교적 기만, 그리고 끔찍한 인권침해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와 대화하는 건 효과적인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새 정부가 북한을 어떻게 다룰지는 모르겠지만, 현명한 대북정책은 이상주의가 아닌 실용주의적 관점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흥남철수가 가르쳐준 인도주의적 교훈을 잊지 않았다. “‘바텀 업(bottom-up)’으로 스포츠 선수 같은 북한 사람들을 인도적으로 돕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요. 많은 역사적 사건들처럼, 흥남철수는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현봉학 선생님께선 10만명을 철수시켰지만 10만명은 남아 있었다고 하셨어요. 증조할아버지도 평생 남겨두고 온 사람을 생각하셨겠죠. 피란민들이 돌아가서 친척, 후손들과 만날 때까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우린 나쁜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남다른 인연 때문일까. 그에게 한국은 몇 번이고 떠나도 다시 찾게 되는 나라다. “한국이 좋아요. 너무 더운 7, 8월만 빼고요(웃음). 안전하고, 재밌고, 편리하고, 항상 변화하는 나라예요. 국제 관계에 관심 많은 제게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의 중심부이기도 하죠.”

전국 곳곳에 포니 대령의 흔적이 있고 그도 다녀갔다. 거제도의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에 포니 대령의 얼굴이 새겨졌고, 해병대 포항기지 앞엔 ‘포니로’가 있다. 휴전 후 미군이 사용하던 포항 기지에 해병1사단이 이전하도록 힘쓴 이도 한국 해병대 수석고문관을 지낸 포니 대령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쉽게도 아내의 건강 문제로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이달 미국으로 돌아간다. 

전쟁기념관을 나서는 그의 눈길이 번화한 용산의 풍경에 가닿았다. “증조할아버지가 살던 시절 용산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제가 만난 참전용사들은 모두 ‘여긴 한국이 아니다’라며 놀라워 하셨거든요. 좀더 사시면서 한국의 발전한 모습을 보셨으면 행복했을 텐데….”

박사를 마치면 “정책 입안 분야에서 일하거나,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벤 포니 동문. 강단에선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지 물었다.

“결정하는 법이요. 아주 복잡하고,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좋은 결정을 내리는 법을 가르치고 싶어요. 흥남철수에서 우린 오늘의 결정이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배웠잖아요. 그만큼 결정 과정이 중요한데, 특히 요즘 SNS나 사회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내 의견만 맞다고 싸우면서 사회적 문제로 번지는 게 안타까워요. 좀 더 깊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자세로 문제를 해결했으면 해요.”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