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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2021년 6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교수·관료·경영자…차선 바꾸며 유연하게 살았어요

권영걸 서울예고 교장
동문을 찾아서

교수·관료·경영자…차선 바꾸며 유연하게 살았어요

권영걸 서울예고 교장




학부에서 응용미술 전공 후 환경대학원에서 환경조경학 공부, 유학 가서 다시 디자인으로 석사학위 취득, 귀국 후 건축학 공학박사 받음. 36년간 교수로 교육·연구에 매진하다 서울시 부시장급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과 한샘 사장 역임, 이어 계원예대 총장을 지내다 서울예고 교장으로 온 이 사람. 권영걸(응용미술69-76) 동문의 변화무쌍한 이력이다.

권 동문은 관·산·학을 관통하는 삶을 살아오면서 공간디자인, 공공디자인을 개척한 선구자로도 불린다. 공간디자인과 공공디자인은 국제 디자인학계에 그가 처음 정립한 용어다. 그동안 쓴 책만42권에 달한다. 쉼 없이 달려온 삶이다.
최근 그가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출마할 거라는 소문이 들린다. 교육감 선거가 1년 남은 지난 5월 31일 서울예고에서 권 동문을 만났다.

내년 서울시 교육감 출마설 돌아
“총장보다 교장선생님 호칭 더 좋아”
직계 제자 중 전임교수만 44명

“어제보다 내일이 더 중요합니다”

-고등학교 책임자로 오셔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대학은 학생들에 대한 관리 책임이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고등학교는 학생들에 대해 학교와 학부모가 연대책임을 지는 곳입니다. 교육이라는 본원적인 기능 외 그들의 보건과 위생, 건강과 안전에 잠시도 경계심을 늦출 수 없는 곳이지요.”

-여기로 오실 때 주저하지는 않으셨나요? 교장선생님이란 호칭은 어떠신지.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총장 시절에 사석에서 민족사관고 같은 곳에서 교장 제의가 오면 당장 달려가겠다고 했었는데, 말이 씨가 된 듯합니다. 35년 반을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지만, 대학은 높은 가치를 전하는 곳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성교육을 펴기에는 이미 늦은 곳이지요. 그래서 ‘엘리트는 고등학교에서 만들어진다’는 금언이 있어요. 좀 오래된 영화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와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두 영화를 비교해 보면, 제 말이 쉽게 이해되실 겁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계속 저를 총장이라고 불러요. 아마 저를 더 존중해 준다고 그러는 것 같은데, 교장선생님이 더 좋아요.”

-서울예고는 전국에서 서울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고등학교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전국 고등학교에서 서울대에 최다 합격생을 낸 학교입니다. 일류 또는 명문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학교지요. 그러나 저희는 그러한 찬사에 안주하지 않고, 진정 일류이고 명문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일류는 사회적 평가이고 세속적인 기준에 따른 것이지만, 명문은 그 위에 도덕적 기준이 부가됩니다. 취임 후 명실상부한 명문으로 나아가기 위해 명확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담은 예고북(YeGo Book)을 발간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 ‘나와의 약속’이라는 10개의 실천 강령을 제정하고,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그 푯대를 향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다양한 커리어를 갖고 계십니다. 변화와 도전을 좋아하는 DNA를 갖고 계신 것 같으신데.
“대학에서 35년, 서울시에서 3년간 도시행정 지방행정을 경험했고, 기업에서 3년간 디자인경영을 했습니다. 오랜 교수생활을 통해서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와 시대정신을,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를 규율했던 관료 경험에서는 조직을 유기적 전체로 보는 통합성을, 기업경영을 통해서는 시장과 고객을 읽는 눈과 프로세스의 효율성을 익혔지요. 차선 변경을 많이 하면서 인생을 살아왔는데, 이제 그간의 여러 경험들을 바탕으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맞는 교육행정을정립하고, 시대를 이끌 예술교육의 새로운 모형을 만들고자 합니다. 도시행정도 기업경영도 그렇지만, 인간을 향상시키는 교육이야말로 융합과학이자종합예술입니다.”

-내년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출마한다는말이 들립니다.
“제가 말한 적도 없는데, 주변에 권유하는 여러분들께서 낸 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자리는 현충탑에 분향하고 임해야 할 자리 아닙니까? 현재 중등교육의 장은 심히 정치화 되어 있어서 많은 국민들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저도 이 격변의 시대에 길을 잃은 초중등교육과 나라의 미래에 대해 고뇌하는 사람의 하나입니다. 훌륭한 분이 나오셔서 교육을 바로 세워, 나라를 바로 세워 주기를 기도 합니다.”

-서울시 부시장으로 계실 때 많은 일을하셨지요.
“퇴임 후 세어 봤더니 200여 가지 프로젝트를 주도했더라고요. 서울을 걷다 보면 산과 강, 거리와 광장, 작은 시설물에 이르기까지 그때 일한 게 파노라마로 보입니다. 한강르네상스, 남산르네상스, 거리르네상스 등이 그중 큰 프로젝트였지만, 가장 의미 있었던 것은 디자인가이드라인의 제정이었습니다. 공공공간, 공공건축물, 공공시설물, 공공시각매체, 옥외광고물 등 5대 부문에서 디자인 펀더멘탈을 정립한 것입니다. 원칙과 표준이 있는 도시로 가는 기초를 닦은 것이지요. 제가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공공디자인 프로젝트였습니다.”

-공공디자인학회를 창설하고 디자인 공개념을 최초로 제창하는 등 도시디자인 공공디자인의 전국적 확산을 주도하셨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제가 전국적으로 공공디자인 열풍을 일으키기 전까지, 디자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오직 상업디자인에만 국한되어 있었어요. 사실 디자인은 오래 동안 세분화된 표적시장의 취향에만 맞추어져 있었고, 기업의 유효한 마케팅 수단으로만 존재했지요. 그러나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사회 공공재이고, 국가 경쟁력의 핵심 도구이며,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원천 수단입니다. 그래서 디자인의 공개념을 주창했던 것이고, 디자이너들의 시선을 ‘5%를 위한 디자인’에서, ‘모두를 위한 디자인’으로 돌렸지요. 이러한 흐름은 시대정신이기도 합니다.”


대담 : 홍지영(불문89-93) SBS 선임기자·본지 논설위원



-안동에서 태어나셨는데, 서울에는 언제올라오셨습니까?
“초등학교는 안동에서, 중학교부터는 서울에서 다녔습니다. 보성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최 린 선생을 비롯 독립운동가가 즐비했던 학교여서, 학풍이 규범적이고 고상하여 이 나이 되도록 동기들과 교유할 때마다 대화의 내용과 화법과 행동에서 향기를 느낍니다. 안동에서 10년 살았고, 서울과 외국에서 60년을 살았는데, 모임에 나가면 사람들이 저를 안동사람이라고 소개하더라고요. 뿌리를 중시하는 문화가 강한 듯합니다.”

-응용미술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응용미술이란 단어가 무척 생소할 때였을 것 같습니다만.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낡은 성적표를 가지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미술과에 재조(才操)가 뛰어나니 가정에서 각별한 지도를 요망함’이라고 적으셨더라고요. 중학교 때는 서예 대가이신 조수호 선생님이 미술선생님이셨는데, 제 그림이나 공작이 늘 정교하고 분석적이어서, 너는 응용미술과가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말하자면 좌뇌로 그린 그림이었던 거지요. 결국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응용미술과에 입학했고, 오늘날까지 잘한 선택으로 생각합니다.”

-4·19 혁명과 군부독재가 시작될 무렵 학창시절을 보내셨는데, 어떤 학생이셨는지.
“71년에 미술대학 학생회장으로 교련 반대 데모에 앞장서기도 했지요. 요즘 학생들의 분위기와는 매우 달랐는데, 수업만 끝나면 목로주점에서 시국토론으로 날을 보냈지요. 돌아보면 그 당시 서로 위로하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런 개똥철학 논쟁으로 성장한 것 같아요. 저항이 낭만이었던 시대였습니다.”

-졸업 후 환경조경학을 공부하고, 미국UCLA에 가셔서 디자인으로 석사를 하셨습니다. 귀국해서 건축공학 박사학위를 받으셨고요. 디자인으로 일관되게 공부를 하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종로에서 태어나 마포에서 살다가 동대문에서 죽는 사람처럼 안쓰러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신대륙 탐험을 좋아하는 제 기질에도 연유하겠지만, 같은 건물에서 같은 교수님께 10년을 배우기보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삶을 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산업디자인에서 환경조경학으로, 나아가 공간디자인, 건축계획학, 도시디자인, 국가디자인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한 우물 파기, 외길 인생만이 예찬되던 그 시절에 참 겁 없었다고 생각돼요.”

-현재 두각을 나타내는 제자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소개해주신다면.
“저에게 석사 박사과정 지도를 받은 직계 제자 중 대학의 전임교수가 무려 44명입니다.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제가 참 부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산업디자인, 공간디자인, 공공디자인을 가르쳤는데, 그들의 사회진출은 전공영역에 가두어지지 않고 거침없어서, 뽀로로 창업자도 있고, 여수엑스포, 동계올림픽 등 국가적 대사가 있을 때마다 디자인 주역들이었고, 심지어 영화감독도 나왔지요. 중앙정부 지방정부의 산하기관장도 있고, 특허청이나 매스컴 등에서도 활약하고 있어요.”  

-가치관을 들려주십시오.
“30여 년 제자들과 사제동행을 하면서 많은 책을 펴냈는데, 제 책에는 형용사와 부사가 절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글과 담화에서 콜레스테롤을 다 빼는 거지요. 교수 시절에도 느린 행정절차와 방만한 회의 등 대학의 비효율을 혐오했습니다. 생각과 행동에서, 시공간의 설계에서도, 그리고 제반 규정에서도 불필요를 걷어 내는 일에 늘 매진했습니다. 제 전공인 디자인은 생태계의 속성인 절약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저도 이콜로지(ecology)는 이코노미(economy)라는, 자연에 내재된 경제원리의 실천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담배는 평생 안했고, 술도 거의 안합니다. 특별한 건강관리법은 없고, 늘 맑은공기와 물, 정한 음식, 가벼운 움직임,좋은 인간관계, 태평한 마음, 행복한 상상을 하며 삽니다. 여성이 임신을 하면피우던 담배도 즉각 끊고, 본능적으로아름다운 것만 보고 듣고 생각하려 하는데, 그런 상태를 유지하면 일생 건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미대 동창회장을 맡으셨는데, 친목 단체꾸려나가기가 부담스럽지는 않으신지.
“부담스러우면 회장 맡지도 않았지요. 재미있을 것 같아 수락했습니다. 동창회장의 할 일이야 이산가족 찾기처럼 국내외로 흩어진 동문들을 찾아 연결해주고, 상호작용이 왕성히 일어나게 하는 것이 최우선 할 일이지요. 제가 연임을 했으니, 그렇게 구축된 동문 네트워크를 통해 동문전을 지속하고, 아카이브 제작 사업도 지원하고, 미술나눔옥션을 통해 기금도 확충하겠습니다. 또 재학생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 탈북민 자녀가 다니는 여명학교를 지원하는 사회사업도 계속하겠습니다. 이렇게 한껏 늘어난 사업들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저희는 사단법인 에스아트플랫폼을 창설했습니다.”

-삶을 뒤돌아볼 때, 후회되는 것은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어제보다 내일이 더 중요합니다.”



권 동문은

1951년 안동 출생. 모교 응용미술과를 졸업하고 모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수학. 캘리포니아대(UCLA) 건축디자인대학원 졸업 후 고려대 대학원 건축공학과에서 박사 취득. 모교 디자인학부 교수, 모교 미술대 학장, 모교 미술관 관장, 서울시 부시장, 한샘 사장, 계원예대 총장을 지냈으며, 창조경영대상을 수상했고, 황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대통령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위원,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 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신문명디자인’, ‘나의 국가디자인전략’, ‘공공디자인행정론’, ‘서울을 디자인한다’, ‘공간디자인16강’, ‘색채와 디자인비즈니스’ 등 42권의 저서를 펴냈다. 현재 서울예고 교장, 동서대 석좌교수, 사단법인 문화창조연합 이사장, 국가디자인전략연구소 소장이다.



정리=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