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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2020년 12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LG의인상 박종수 치과의원장 "봉사에는 학벌 필요없어요, 성공했으면 갚아야죠"

55년 동안 3만여 명 무료진료



봉사에는 학벌 필요없어요, 성공했으면 갚아야죠

LG의인상 수상
박종수 치과의원 원장




동문 도움으로 아버지 생명 구해
55년 동안 3만여 명 무료진료



11월 30일 아침 8시 광주광역시 서동 무료급식소 사랑의 식당 앞. 영하에 가까운 날씨에도 두툼한 외투를 입은 노인들이 담을 따라 길게 줄을 지어 섰다. 작은 손수레를 끌고 온 노인도 있었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사랑의 식당에서 배부하는 무료 급식. 닫힌 대문에 ‘월요일 아침 9시 배식, 코로나19로 인해 차상위계층, 독거노인과 노숙인 등에게 2020년 2월 22일부터 대체식을 제공한다’는 공지가 붙어 있었다.

이날 사랑의 식당을 찾은 것은 최근 LG의인상을 받은 박종수(치의학60-66) 동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91년 사랑의 식당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노숙인과 독거노인 등을 위해 무료급식 봉사를 해왔다. 한편 광주 시내에서 치과의원을 운영하며 55년간 소외 계층 3만여 명에게 무료 진료를 펼쳤다. 지역사회에선 잘 알려진 봉사인이다.

“코로나19가 만연하기 전엔 사랑의 식당에서 매일 점심 배식을 했어요. 많으면 800명 정도 찾아왔죠. 지금은 6일치 도시락을 일주일동안 만들어서 월요일마다 나눠줍니다. 300명 정도는 직접 받으러 오고, 350명 분은 봉사자들이 배부하러 직접 방문해요.”

박 동문의 안내를 받아 사랑의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곳곳에 도시락을 담은 비닐봉지가 그득 쌓여 있었다. 1월까지만 해도 매일 오전 11시부터 배식받는 이들로 가득찼던 공간이다. 9시가 되자 식당 입구에서 도시락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체온을 재고 밥과 반찬, 국과 김치가 담긴 묵직한 봉지를 받아든 이들의 얼굴이 밝았다. 박 동문은 “명절이면 제사 지내시라고 제물 봉지와 현금 2만원을 넣은 봉투도 드린다”고 말했다.





사랑의 식당 외부(위 사진)와 내부 모습. 코로나19 유행 이후 현장 배식에서 도시락 배부로 급식 방법을 전환했다. 


사랑의 식당은 평생 봉사해온 박 동문의 종착지라 할 수 있다. 실은 무의촌 진료가 봉사의 시발점이었다. 치대 재학시절부터 시작한 무의촌 의료봉사를 광주에서 보낸 군의관 시절에도 꾸준히 해왔다. 1969년에는 한 사회단체에서 경찰 경비정을 전세 내 흑산도, 홍도, ‘삼시세끼’로 잘 알려진 만재도, 가거도까지 들어갔다. “그때 지방 간호대학 조교로서 봉사 왔던 제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한여름에 섬에서 숙식하느라 모두 까맣게 타고 지쳤는데 유난히 맑고 밝은 모습에 반했죠. 그때부터 함께 봉사하러 많이 다녔어요.”

공중보건의 제도가 생긴 후 무의촌 진료 수요가 사라지자 가까이로 눈을 돌렸다. 광주 시내에도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가족, 외국인 근로자 등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많았다. 치과로 불러들여 틀니와 치료를 해줬다.
이 무렵 사랑의 식당 설립자 고 허상회씨를 만났다. 허씨는 광주 시내 불우 청소년을 데려다 구두닦이 일을 하게 하고 그 돈을 각자 저금하게 해 공부를 시켰다. 곁에서 박 동문은 아이들의 건강을 돌봤다. 고향은 아니지만 베풀고 인연을 맺다 어느새 광주에 정착했다.

“허상회 원장이 자수성가시킨 아이들이 50년 동안 1,000명이 넘습니다. 국가 관리로 불우 청소년도 사라졌죠. 그래서 인근 광주공원의 굶고 있는 노숙인들을 열 명, 스무 명씩 데려와 식사를 대접하다 보니 100명, 200명으로 늘어나 사랑의 식당이 됐습니다. 광주시 치과의사회 회장을 지낸 제가 모금을 맡았고, 사랑의 식당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분도와 안나 개미꽃동산’의 창립멤버가 됐어요.”

어둠이 걷히면 또 다른 어둠을 찾아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20대 청년이 팔순이 될 때까지 그것을 반복했다. 끊임없는 헌신과 열정의 원천을 묻자 그는 “궁핍했던 경험과 기적같은 베풂을 받은 기억”으로 요약했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병환을 얻어 퇴직하시면서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납부금이 밀려 정학을 당하기도 했죠.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어 겨우 대학에 왔는데 아버지가 다시 악성종양을 앓아 대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서울로 모시고 와서 국립중앙의료원 무료수술에 지원했지만 거부당했어요. ‘대학생까지 있는 가정이 왜 극빈자냐’는 이유였죠.”

악바리 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병원 정문에 서서 출근하는 담당의사를 향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우리 아버지 좀 살려주십시오’를 외쳤다. 소공동 치대로 달려가 수업을 듣고 퇴근시간에 맞춰 다시 병원으로 왔다. 그렇게 8개월을 보냈지만 요지부동. “없는 자는 죽어야 하는가”, 비정한 세상을 비관하며 생의 끝을 생각했다.

딱하게 여긴 모교 교수들과 중앙의료원 치과의 박광진(치의학49졸), 박헌철(치의학58-64) 동문 등도 노력을 총동원해 도와주기 시작했다. 무료 입원이 성사되던 날, “부친을 위한 정성에 감동했다”며 “평생 부친의 병환을 맡겠으니 마음 놓고 공부하라”던 주치의의 말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동시에 ‘졸업 후 평생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인술을 펼치며 살겠다’고 약속했다. 과외비로 아버지의 하숙비를 내고 등록금 낼 돈이 없을 때 ‘어려우면 우리집에 오라’며 함춘장학금을 배정해준 김인철(치의학49졸) 당시 치대 교무과장 덕에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몇 년 후 아버지 병이 또 재발했을 땐 군의관 월급을 모두 모은 돈을 수술비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무료로 진료해주겠다 하여 실랑이 끝에 절반만이라도 받으시라고 주장하며 원무과에 갔더니, ‘그때 그 효자 치대생 아니냐’면서 아예 0원으로 만들어주더군요. 수술 받고 아버지께서 10년을 더 사셨습니다.”

본과 4학년부터 선후배를 모아 경기도로 진료 봉사를 다니고 월남전에 파병돼서도 장병과 현지 주민을 가리지 않고 두루 치료해 베트남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군의관 시절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봉사심은 더욱 단단해졌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같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이 말이 그의 봉사 신조다.

“징은 소리가 요란합니다. 영혼이 없는 사물에 불과하죠. 무의식적으로 하면 안 되고 처지가 어려운 사람을 긍휼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그 봉사에 사랑이 깃들어요. 늘 스스로 ‘나는 울리는 징이 아닌가’ 점검합니다.”





박 동문의 봉사 활동을 기록한 사진. 



소외 노인 무료급식 사랑의식당 맡아
시설 증축해 무료 치과 여는 게 목표


2016년 작고한 허상회씨의 뒤를 이어 사회복지법인 분도와 안나 개미꽃동산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숙제가 생겼다. “사랑의 식당 건물을 증축해 1층은 무료급식소, 2층은 불우 노인을 위한 무료 치과와 건강센터를 만들자”던 허씨와의 약속을 실현하는 것이다. 허씨는 ‘그 돈을 노인들 돕는 데 쓰라’며 본인의 연명치료조차 거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허 원장 시절 모금한 것을 1원 한 장까지 잘 모아놨더군요. 배식하면서 100원씩 자율적으로 받은 돈을 20년간 모아 6,800만원이 쌓였어요. 식자재는 시에서 제공하지만 건물을 증축할 재원은 턱없이 부족해 후원이 절실합니다.” LG의인상으로 받은 상금 역시 당연히 사랑의 식당 신축에 보탤 예정. 2층에 무료 진료소만 열면 개인 병원도 바로 정리하고 올 생각이다.

박 동문 자신이 국제라이온스협회 광주지역 총재와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을 지낸 마당발. 여기에 전남대 간호대 학장으로 후학을 길러온 아내 박오장씨를 통해서도 의료봉사 인력을 이미 확보했다. 함께 의인상을 받은 조영도 사랑의 식당 총무이사는 허씨의 도움을 받은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구두닦이로 일하며 무보수로 식당 살림을 도맡고 있다.

“저는 이곳 자원봉사자들을 천사라고 부릅니다. 한 76세 봉사자는 사업에 실패해서 죽고 싶을 때, 6개월이라도 봉사하고 죽으면 저승에서 용서해줄 것 같아서 시작했대요. 그런데 마음이 너무 편해졌다면서 벌써 10년째 봉사 중입니다. 식사를 마친 분들의 옷에 묻은 음식물을 깨끗이 닦아 보내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 ‘이곳이 천당이고, 에덴동산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는 광주의 개미꽃동산이 충북 음성의 꽃동네와 같은 곳이 되길 꿈꾼다.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 하더라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거리의 걸인 또한 마찬가지”라며 “식사를 하기 위해 언덕을 올라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웃음지었다.



11월 30일 사랑의 식당을 찾은 사람들의 체온을 재고 도시락을 배부하는 모습  


봉사하고 싶은 서울대 동문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초등학교도 못 나온 허상회 원장이 구두닦이 소년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면서 봉사는 학벌과 관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답했다. 그저 끊임없이 봉사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 작가가 되어 자신의 지난 여정과 지론을 글로써 표현하고픈 생각도 있다.

“아침마다 시험을 보던 치대 시절, 만원 열차에 서서 책을 보고 있으면 어르신들이 ‘서울대생, 앉아서 공부해’ 하면서 자리를 내어주셨어요. 동문이라면 그렇게 선망 받고 도움 받은 기억이 다들 있을 겁니다. 성공했으면 갚아야죠. 허 원장님이 키운 구두닦이 출신 아이들이 모두 성공해서 지금 사랑의 식당을 후원하고 봉사하고 있어요. 구두닦이도 열심히 하는데, 서울대인이 먼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참된 봉사로 이 땅에 희망을 주는 여정에 동참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문의: 062-652-5158, 010-3601-6257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