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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2019년 11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교수 정년 6년 남겨두고 에티오피아로 날아간 까닭은

김용민 국경없는의사회 구호활동가


교수 정년 6년 남겨두고 에티오피아로 날아간 까닭은

김용민 국경없는의사회 구호활동가




두번째 인생, 남 돕는일에 올인
국경없는의사회 동문 5명 활동


”‘왜 그랬어요?’,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의대 교수직을 중도 퇴직하고 구호 활동에 뛰어들었을 때 주위에서 보인 첫 반응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나면 ‘실은 나도 하고 싶었어’, ‘언젠가 저도 할 거예요’ 하는 반응으로 바뀌어요. 마음속에는 다 남을 돕는 삶에 대한 꿈이 있는데, 현실의 제약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이타적 본성이 더 많이 깨우쳐졌으면 좋겠어요.”

모교 의대 졸업 후 30여 년간 후학 양성에 매진해온 김용민(의학78-84) 충북의대 명예교수. 정년까지 6년 남은 지난 2018년, 은퇴를 선언하고 ‘국경없는의사회’ 구호활동가로 변신했다. 활동지역도 에티오피아 오지 감벨라, 총성이 끊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등 험난하다 못해 위험한 곳을 찾아다녔다. 정형외과 전문의가 가장 필요한 곳이 총상이나 폭탄 피해 환자가 많은 분쟁지역이라는 이유에서다. 지난 10월 21일 서울 강남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회의실에서 김용민 동문을 만났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 처음으로 해외 구호 활동을 경험했습니다. 활동 마지막 날 ‘한국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있어 달라’고 되뇌는 현지인의 절절한 호소로 인해 막연하게나마 때가 되면 다시 험지의 환자들을 돌보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 같아요. 당시엔 제 아이들도 어렸고 몸담고 있는 학교와 병원, 학회 등에서 짊어진 역할 또한 가볍지 않았습니다. 안팎으로 주변 정리를 하는 데 8년이란 세월이 걸린 셈이죠.

언젠가는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겠다는 열망은 꽤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어요. ‘55세 전엔 대학에서 나가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었죠. 급속도로 발전하는 의료계 환경 속에서 최고의 효용이 지나면 후학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게 선생으로서 마지막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김 동문의 구호 활동의 근원은 사실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라남도 무의촌 지역에 공중보건의로서 3년을 근무했고 이중 절반을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보냈던 것.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만을 위한 시설로 당시 일반인은 접근을 매우 꺼렸던 곳이다. 게다가 전문의만 근무할 수 있는 곳이어서 의대를 갓 졸업한 김 동문이 처음부터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근무를 자원하는 편지를 보냈고 1년의 기다림 끝에 발령이 났다. 전문의 한 명이 한센병 공포증에 걸렸던 것. 김 동문은 “소록도에서의 1년 반이 지금의 나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정형외과는 경쟁률이 높은 과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무조건 정형외과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한센병 환자 진료에 평생을 바친 고 김도일(의학48졸) 한국나병연구원 원장님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과로 정형외과를 꼽았기 때문이죠. 건국대 병원장으로 재직 중인 동기 황대용(의학78-84) 동문이 당시 제 얘기를 듣곤 ‘나보단 네가 정형외과를 해야겠다’며 다른 과를 갔어요. 그 친구 한 명 양보해줬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요(웃음). 소록도에 대해 알려준 전종관(의학78-84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 동기, 30년 멘토 김인권(의학69-75 한국한센복지협회 회장) 선배도 제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용민 동문은 자신이 의사가 된 것도, 구호활동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도 “서울대였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사립대학의 절반도 안 되는 등록금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았고, 본과 4학년 땐 의대동창회에서 지원하는 장학금도 받았다. ‘스카이캐슬’ 같은 드라마에선 종종 최상층의 전형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모교가 공익적 목적 아래 설립된 학교인 만큼 원칙을 지키고 박애를 실천하는 서울대 출신 동료 의사들을 많이 만난다고. 김 동문을 포함해 5명의 모교 출신 의사들이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모교는 가정 형편과 상관없이 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고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공헌해왔습니다. 제가 그 실례이자 직접적인 수혜자인 셈이죠. 모교가 통합 개교한 지도 73년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최근 논란이 된 입시 제도나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서울대 출신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급격히 변하면서 파생된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것대로 인정해야죠. 그러나 수많은 동문들이 좋은 일도 열심히 하잖아요. 서울대 출신이면 능력도, 여건도 출중하게 마련일 테니 보다 적극적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해줬으면 합니다.”


김용민 동문(맨 왼쪽)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알-아크샤 공립병원에서 국제 구호활동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국경없는의사회




김용민 동문은 최근 ‘땜장이 의사의 국경 없는 도전’이란 책을 펴냈다. 책 속에서 김 동문은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통찰을 ‘땜장이’에 응축시켰다. 넉넉지 못한 집안의 막내라 온전한 자신만의 선택을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남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고 남이 꺼리는 일을 도맡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또한 인생을 사는 일종의 제안으로서 ‘어드벤더링’을 제시하기도 했다.

“어드벤더링은 ‘목적성 있는 방황’(Wandering)과 ‘지속적 도전정신’(Adventure)을 합친 말입니다. 선택의 기회가 많이 남은 젊은이들뿐 아니라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제 또래들에게도 새로운 모험과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도록 독려하는 차원에서 생각해낸 단어죠.

저 역시 현실적 제약은 있었습니다. 정년퇴직과 명예퇴직 사이의 격차도 그랬고, 대학교수와 구호활동가 사이의 격차도 그랬죠. 자녀가 넷인데, 막내딸이 삼수 끝에 올해 서울대 후배가 됐습니다. 현실적 요건만 놓고 보면 학교에 남는 게 옳았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새로운 도전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저울의 한쪽에, 그로 인한 위험과 불확실성을 다른 한쪽에 올려놨을 때 저에겐 전자의 무게가 더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용기 있게 결단을 내리게 됐죠. 더 많은 모교 동문들이 용기 내줬으면 합니다.”

김용민 동문이 소속된 국경없는의사회는 1971년 프랑스 의사와 언론인들에 의해 설립된 NGO 단체로, 세계 70여 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다. 의사, 간호사, 행정지원가 등 4만여 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1996년 서울평화상, 1999년 노벨평화상 등을 받았다.

김 동문은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구호 활동 외에도 유튜브 의학채널 ‘비온뒤’에서 정형외과 관련 강의도 하고, ‘엄홍길휴먼재단’에서 진행하는 네팔 오지 주민 의료사업에도 동참하는 등 여전히 왕성한 사회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