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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호 2016년 9월] 오피니언 학생기자의 소리

이지은 학생기자의 칼럼

내몰린 대학생의 방학
내몰린 대학생의 방학


이지은

(정치외교 15입) 학생기자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무더위 끝에, 드디어 가을이 왔다. 등굣길에 버스 창가자리에 앉아 어느덧 쌀쌀해진 아침바람을 맞고 있으면, 문득 뜨거운 태양 아래 쉼 없이 뛰어다녔던 지난 두 달여의 시간이 그려진다. 

각기 다른 이유로 비행기만 열 번을 탔다. 동아리에서 논문도 한 개 썼고,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협찬을 따냈고, 번역봉사와 서포터즈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유일한 취미인 해금연습을 했다. 그러나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보다도 늘 불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일정을 짠 건 나지만 사실 정말로 이런 방학을 보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이건 그저 ‘내몰린 방학’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서울대에서의 세 번째 방학이었다. 첫 방학을 마무리하던 시점에 동기, 선배들이 보낸 방학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이후로, 나에게 방학이란 막상 코앞에 닥치면 부담스러운 것이 됐다. 방학은 하루하루를 무엇으로 채워나갈지가 전적으로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기 때문에 요즘과 같은 무한경쟁시대에 쉬면서 낭비하기보다 차별화된 스펙으로 무장하기에 최적화된 시간이다. 

서울대생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훌륭한 학생들이 많은 만큼 대단한 일들을 해내는 게 당연해지고 그걸 바라보는 일부 학생들은 적어도 그만큼의 일을 해내지 않으면 도태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쉽사리 휩싸인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해낼 수 있는 사이의 괴리에 자괴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지는 서울대생들을 종종 봐왔다. 나 역시도 무언가 하고 있음을 남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고, 하고 싶었던 일들은 미루고 ‘있어 보이는 일’들로 지난 방학을 가득 채웠다. 행복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 결과 나는 두 달여의 시간을 후회 속에서 보내야 했다. 흔한 대학교 2학년 학생으로서 지난 학기에 나는 대학생활에 상당한 염증을 느꼈다. 왜 이 공부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 뭘 해야 할지를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현실에 치여 이런 고민을 외면한 채 학기를 보냈고, 방학도 마찬가지로 보낸 지금 나는 여전히 ‘대2병’ 환자다. 

후회스러운 방학을 보내는 이 시점에서 생각건대, 굳이 모든 순간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최고가 돼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서울대학생들은 모든 순간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금세 밀려나는 치열한 환경 속에서 스무 해 남짓한 시간을 살아왔다. 

그러나 고작 전교 석차나 수능 따위에 미래가 갈리던 고등학교 시절은 진즉 지났다. 최고를 가르는 기준은 결코 하나도 아니고, 남들에게 있지도 않다. 무엇을 했건 간에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이 든다면 된 것이다. 모두가 동시에 평가를 받아야 하는 특정한 시점도 없다. 그저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돼가는 과정을 즐기다보면 언젠가는 최고가 돼 있을 것이다.

당장 남들에게 보여줄 허울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인생을 내 것으로, 그리고 길게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만의 페이스가 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 있어서 나 자신의 페이스는 나만이 알 수 있기에, 왜 달리지 않느냐고 남들을 재촉하기보다 자신의 페이스를 찾을 수 있도록 여유를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