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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2015년 8월] 문화 꽁트

돈의 사내

김진수 월간 회원광장 주간


돈의 사내










金鎭洙(농공62입) 월간 회원광장 주간




2014년 어느 봄날 초저녁, 강남구에 소재하고 있는 한정식 식당인 ‘뜰’에, 20여 명의 재경 임순군 출신 고향 선후배로 구성된 모임(임순사랑회)이 열리고 있는 자리. 윤영일 회장의 인사말이 시작되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참석해 주시니 참 반갑소. 우리가 40~50대에 처음 만나 20년 세월이 지났으니, 이젠 모두가 60대~70대가 되었소. 그렇지만 회원님들의 얼굴을 보니, 아직은 새파란 젊은이들 같소. 나도 아직은 젊음을 잃지 않았소. 보시다시피 짧달막한 키에 계란 같은 내 얼굴을 보는 젊은 여자들마다, 지금도 나를 따르고 있다오. 젊었을 적부터 노가다 출신이라서 내 몸이 단단한 편이라오. 내가 지금 73세이지만, 젊게만 살고 싶다오. 여러분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오. 나는 원래 아는 것도 적고, 말솜씨조차 없어서 두서없는 말을 했소. 양해 해주시오. 고맙소. 모두들 맛있게 잡수시고 좋은 얘기들 서로 많이 나누시기 바라오.”


조금은 무식한 듯하나 자기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 윤회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자리에 참석한 20여 명의 회원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이어서 공용열 총무가 그간의 회원 동정에 대한 말을 했다. “김형성 작가님의 새로운 소설집 '참회'가 발간되었습니다."라는 소개가 있자, 박수소리가 '뜰'의 천정을 꿰뚫을 듯한 기세로 이어졌다. 공용열 총무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요, 또 빅뉴스가 하나 있습니다. 천종열 회장님 가문에 큰 경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천회장님의 장남 혼사가 오는 6월 19일에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출신의 안과의사인 며느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에, 회원들은 의아한 표정들이었다. 천종열 회장이야 돈은 많은 부자이지만, 그의 장남은 이름 없는 지방대학 출신이었고, 뚜렷한 직업조차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고, ‘축하한다’는 말을 천회장에게 건네고 있었다. 이때 천종열 회장이 사전에 총무의 양해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여러분, 나는 이미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다시피, 복을 못 받고 태어나 초등학교 중퇴를 한 사람 입니다마는, 지금은 ‘수천억대’ 부자라는 말을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종종 이야기해왔던 대로, 나는 사실상 서울상대 출신이에요. 서울상대 출신보다도 더 능력이 나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서울상대 출신이 개인적으로 나만큼, 돈 잘 번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나는 그까짓 것들 다 대적해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총무가 이야기한 대로, 내 장남을 오는 6월에 결혼시킵니다. 그런데 내가 본래 목표한 대로 며느리나 사위만큼은 꼭 서울대학 출신을 데려오려고 했었습니다. 우리 집안도 서울대학교 출신 가문을 이루려고 했지요. 이번에 며느리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온 안과의사로 내가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회원님 중에는 김작가님과 양교장님 같이 서울대학교를 나오신 분은 있으시지만, 서울대학교 출신 며느리를 맞이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나는 그것을 해냈습니다.”


천회장의 말이 계속되는 도중에, 회원 한 사람이 “부럽습니다. 무슨 재주로 그러한 며느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으니, 천 회장은 더욱 신바람난 듯 “참으로 좋은 질문이요. 그렇잖아도 그 이야기가 좀 하고 싶었는데 잘 됐소. 지금 이야기하지요. 중매쟁이에게 서울대학교 출신 며느리 감을 구해주면 소개비로 3천만원을 주겠다고 약속 했고, 또 며느리의 친정 부모에게는 평생 동안 매월 천만원씩 생활비를 줄 것이고, 며느리에게는 개업함에 따른 모든 비용이 1백억 이상이 들어도 다 대줄 것이며, 손자를 낳아주면 서울 근교에 있는 내 땅 중에, 한필지로 되어있는 약 40만평의 땅과 그 지상에 있는 건물 10채를 손자 명의로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해주겠다고 했지요. 이렇게 제안을 했더니만, 여러 사람이 서로 다투어 몰려옵디다. 돈이 좋기는 좋으나 봅디다.
세상에 돈 가지고 안 되는 일 있습니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돈을 임금으로 대했지요. 그리고 나는 살아오면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했어요.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던데요. 공무원들이요? 이것들 돈만 주면 무조건 내 요구대로 해주더라고요. 국회의원, 그것들은 더욱 쉽습디다. 수시로 돈 천만 원씩 손에 쥐어주면, 나더러 ‘회장님’ 하고 허리 굽혀 인사해요. 그것들이 뭐가 잘났습니까? 내가 그것들보다 훨씬 잘났지.” 말을 듣고 있는 회원들이 평소에도 천회장의 ‘삶의 질’ 과 '인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터에, 위와 같이 말을 내뱉고 있으니 회원들 모두가 짜증스러운 인상을 짓고 있었다. 이것을 눈치 챈 총무가 천회장의 입을 막았다.


“천회장님의 장남 혼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회원님들께서 그날 예식장에 모두 오셔서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모순된 자아실현 의식의 늪에 빠진 채, 마구 말을 쏟아내던 천회장이 미소를 볼에 띄우며 자리에 앉았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동문



저녁식사를 하며 술을 한두 잔씩 하다 보니까 별별스런 얘기들이 많이 오갔다. 그러던 중에 천종열 회장이 김형성 작가를 향해 “어이 김 박사님, 김 작가님, 내 전기를 하나 써서 출판을 해야겠는데 어떻습니까? 전기 하나 쓸 만한 인물은 되지요? 나 같은 사람 사실 드물지 않습니까? 하나 씁시다. 수고비는 서운치 않게 드리리다. 도와 주십시오.”


천종열 회장이 살아온 발자취를 본다.


그는 1938년 당시 머슴으로 살아가던 ‘이비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두 살 때 장질부사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벼를 심다가 벼락에 감전되어 사망했었다. 고아가 된 그는 같은 부락에 살고 있는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으나 큰아버지 또한 가난 했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올라가자마자 가출하여 시골 읍내에 있는 페인트 가게에서 심부름을 하며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그가 17세 되었을 때 페인트가게 사장이 행방불명이 되었고, 자식이 없었던 가게 주인 아주머니는 사실상 종업원인 천종열의 영업활동에 의지하는 입장이 되어 “나에게 매달 생활비만 주고 네가 모든 것을 맡아 운영하라”는 부탁을 했고, 그 때부터 그가 그 사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몇 년 후 그는 서울 명동에 올라와 술집을 운영하였고, 1960-1970년대 강남이 개발될 무렵에, 강남에도 똑같은 술집을 두 군데나 더 운영했다. 술집 세 곳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강남의 땅을 계속 사들였고 지금은 수천억대 부자 되어 돈에 취해 살아가고 있다.






·金동문은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수필가협회 및 세계시연구협회, 계간문인작가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장편소설 ‘문학인’, 시집 '내가 나를 죽여야 돼' 등 다수의 작품집과 '건강, 행복, 성공으로 사는 지혜' 등의 심리학 저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