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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2018년 1월] 기고 에세이

교수칼럼: 수묵의 아름다움

서세옥 모교 동양화과 명예교수

수묵의 아름다움


서세옥(회화46-50) 모교 동양화과 명예교수



우리가 보고 쓰는 색채에는 각각 다른 의미와 용도가 있다. 따라서 색깔은 서로 조화를 잘 이루고 높은 아름다움을 이루어 내야만 한다.

오랜 옛부터 색깔을 오색으로 집약하여 말한다. 청황적백흑이 색깔의 기본인 오색이 되었다. 화려한 색채를 말할 때 “오색이 영롱”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일찌감치 주말(周末)의 노담(老聃)은 ‘오색령인목맹(五色令人目盲)’이란 말을 남겼는데 “오색 따위를 정해 놓은 것은 색깔 밖의 크나큰 색깔을 못 보게 하여 인간들을 눈멀게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색깔 가운데 가장 큰 의미와 역할을 하는 것은 먼저 흰색이 된다. 흰색은 모든 색깔이 있기 전의 소지(素地)이고 또한 원소다.
옛 주말(周末)의 우리 민족 동이족인 공자가 남긴 말에 ‘회사후소(繪事後素 그림은 흰 바닥이 있는 뒤부터)’를 밝혀두어 소(素), 그러니까 “아무것도 물들지 않은 흰색, 처음이 시작되기 전의 흰 소지”를 알아 둬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흰색의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살아온 것이 우리 민족이다. 지난날 우리는 백의민족으로 넓게 알려져 왔다. 세상에는 흰 색깔 옷처럼 아름다운 옷 색깔은 없다. 갈무리하기에는 힘들었지만 어느 색보다 고결한 표상이다.

흰색에는 항상 검은색을 대비한다. 흰색이 모든 것의 원소라면 검은색은 모든 것을 귀납하는 의미가 내포되고 있다. 백과 흑은 낮과 밤의 대비와 순환의 묘리를 일깨워 주는 절묘한 원융의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흰 옷에 반드시 검은 현관을 쓴다. 이 아름답고 드높은 색감은 생활 전반에 이른다. 의관만이 아니고 방 안에는 흰 벽면에 검은색 가구를, 흰 백자에 검은색 소반을 써 왔다. 어찌 이뿐만이던가. 참으로 놀라운 색감의 수용이 아닐 수 없다.

성당(盛唐)의 풍류를 온몸으로 즐기면서 이백을 필두로 한 시인묵객들이 낮과 밤을 온통 휩쓸던 옛 중국의 명도(근대 이후 남경) 금능에서는 번화한 거리의 이름이 ‘오의항(烏衣巷)’이라 하였는데 지금도 그 이름과 흔적이 남아있다. 그 당시 거리에는 검정 옷차림으로 멋을 낸 사람들이 모였던 때문이다. 의관에 검은색은 지금도 격조가 돋보이는 색깔이다. 그림의 경우는 말할 나위가 없다.

당대의 화가이며 시인이고 관직이 우승(右丞)에 오른 왕유는 “그림에는 수묵이 최고다”란 이름 높은 화론을 남겼다. “먹은 오색과 다르다”는 색채론을 비롯하여 절정에 도달한 화론들이 꽃피어 왔다. 흰색 비단이나 종이를 펼쳐 놓고 장봉의 붓으로 검은 먹물을 휘두를 때 흰 바탕에 검은 먹물의 조화와 선염의 황홀함은 오직 단색의 격조와 아름다움만이 보여주는 변환의 절대경지가 아니던가.

이 자리에는 어떠한 잡동사니 색깔 따위는 문 안에 들어설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