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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2017년 6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노블레스 오블리주 : “누군가의 고민 들어주는 것도 더불어 사는 법이죠”

김수현 생명의전화 자원봉사자, 삼성생명 종합자산관리사



“누군가의 고민 들어주는 것도 더불어 사는 법이죠”


김수현 생명의전화 자원봉사자





24년간 직장생활·전화상담봉사 병행
종합자산관리사로 제2의 인생 시작



한강 다리를 건너다 보면 보이는 흰색 전화부스 여러 대. ‘SOS 생명의전화’다. 삶의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 내미는 손길이다. 다리 위가 아니어도 어디서든 전화를 걸어 상담할 수 있다. 365일, 24시간 전화기 너머에 상담자가 대기 중이다. 24년간 생명의전화에서 상담 봉사해오고 있는 김수현(전자공학69-73·삼성생명 종합자산관리사) 동문도 그들 중 하나다.


1994년, 먼저 상담 봉사를 하던 아내를 따라 얼떨결에 시작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쓰리엠에 근무하던 김 동문은 부사장까지 올라서도 한 달 중 두 번의 토요일엔 반드시 수화기를 잡았다. 아내가 먼저 그만두고, 퇴직과 이직을 하면서도 봉사는 계속됐다. 생명의전화 장기 봉사자 중엔 종교인이나 전업주부가 많고 김 동문처럼 직장생활을 하면서 오래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 5월 25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있는 사람들, 배운 사람들이 봉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겠다’ 생각했고, 그만두려던 때도 있었는데 아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계속 해보라’면서 독려해 줬죠(웃음).”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인터뷰에 나온 김 동문은 지금도 일과 봉사로 나뉘는 일상을 살고 있었다. 2007년 30여 년간 근속한 한국쓰리엠을 퇴직한 그는 삼성생명 종합자산관리사로 재직 중이다. 주로 외부에서 고객을 만나고, 필요한 업무가 있을 때 사무실에 출근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생명의전화 상담 봉사를 한다. 봉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김 동문은 1년간 상담의 기본과 인간 심리 등에 대해 전문 교육을 받았다. 전화를 받으면 나이 정도만 묻고 직업도 잘 묻지 않는다.


“어떤 말이든 들어주는 게 가장 기본이에요. 대부분이 자신의 치부, 가장 밑바닥에 있는 얘기들입니다. 말하고 싶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어요. 상대방을 모르는 전화를 찾게 되는 이유죠.”


그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문제가 다 나온다”고 했다. 하루 열 통 남짓, 20여 년간 전화를 받으니 숱한 고민들에서 시대상의 변화도 읽혔다.


“초반엔 부부 간의 문제가 많았어요. 배우자의 불륜이나 이혼을 고민하는 내용인데 매스미디어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금융위기가 왔을 땐 자영업자, 실직자들 전화를 많이 받았죠. 요즘은 정신질환으로 힘들어하는 전화가 많아요. 그만큼 사회가 살기 힘들단 얘기겠죠.”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상담을 하다 보면 문득 “그 많은 사람의 고민을 들어준 예수님은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장시간 고민을 쏟아내는 전화에는 상담사도 힘이 든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잘 들어주면 대부분은 마음이 풀려 전화를 끊는다고. “상대방도 이쪽에서 진지하게 받는지, 아닌지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한다”는 그의 말이다. 하루에 한두 번은 ‘고맙다’는 말도 듣는다.


술담배 안 하고 운동도 좋아해서 딱히 건강 걱정 없이 살았는데 2015년 심장 스탠트 수술을 받았다. 영문을 모르다가 자신의 완벽주의 성향, 상담 봉사가 ‘스트레스’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상담실을 떠나는 순간 모든 상담 내용을 잊어버리려 한다. 자주 여행을 다니고, 아내와 스포츠 댄스도 즐겨 춘다.


광주제일고 졸업 후 모교에 입학한 김 동문은 학자의 길을 걷고 싶었다. 모교에 ‘우등생 제도’가 있던 1970년 여러 학과가 통합된 교양과정부 전체 우등생으로도 선발됐다. 그러다 뜻밖의 아픔을 겪었다.


“2학년 때 운동하다 다쳐서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건강이 나빠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부모님께 걱정 끼치기 싫어서 휴학도 안 하고 겨우겨우 졸업했죠. 만약 다치지 않고 공부만 계속했다면 완전히 ‘나만 아는 사람’이 됐을 것 같아요. 남을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됐죠.”



1970년 김수현 동문이 수상한 모교 교양과정부 우등상 메달



생각지 못한 직장생활은 진득한 성격에 잘 맞았다. 퇴직 후 지인의 부탁으로 2년간 투자자문사를 운영한 다음 ‘좀 쉴까’ 생각하다 혹시나 하고 인터넷에 올린 이력서로 삼성생명에서 보험 컨설턴트 제안을 받았다. “이 나이에 무슨 보험” 하다가 설명을 들어 보니 당시 갓 도입된 퇴직연금이 눈에 띄었다.


자신의 한국쓰리엠 퇴직금으로 첫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보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보험 공부를 시작했다. 펀드투자상담사, 변액보험판매관리사, 퇴직연금제도 모집인 자격과 종합자산관리사(보험FP) 자격증까지 따고 나니 비로소 “보험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 것을 잘 관리하게 되니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는 깊이도 달라졌다. 5회 연속 생명보험업계 ‘명예의 전당’인 백만달러 원탁회의(MDRT)에 올랐다.


인터뷰 틈틈이 그는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줬다. 폴더별로 잘 정리된 삶의 기록들 중 직접 꾸린 성경과 서양미술사 스터디 모임 사진도 눈에 띄었다. 꼼꼼하고 기계를 잘 다루는 덕에 ‘재능기부’할 기회가 많다고. “어떤 식으로든 사회로부터 혜택 받은 만큼 돌려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전했다. 고 우형주 공대 명예교수가 김 동문의 장인이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