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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호 2017년 2월] 기고 감상평

김영란 동문의 나를 움직인 책 한 권

“바깥 세상과 거리 두고 관찰하며 옳은 삶 고민하게 해”
 나를 움직인 책 한 권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바깥 세상과 거리 두고 관찰하며 옳은 삶 고민하게 해” 




내가 읽어온 많은 책들은 유년 시절에는 사고의 틀을 형성해 주었고 사춘기 시절에는 자신의 한계를 알려주었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돼 주었다. 그 중에는 ‘토니오 크뢰거(토마스 만)’ 처럼 영혼을 뒤흔든 책도 있고 ‘시적 정의(마사 누스바움)’처럼 직업과 연관된 책도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한 예술가의 성장소설이다. 독일 출신의 근엄한 아버지와 이탈리아 출신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어머니를 둔 토니오 크뢰거가 예술가로 성장하면서 겪는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이 소설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보여준다. 한쪽 세계는 자신의 삶과 가치가 일치하는 이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속한 곳이고, 다른 쪽은 100% 자기 인생을 살 수 없는 분열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속한 곳이다. 두 세계에 대한 토마스 만의 묘사를 읽으면서 나는 후자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토니오는 자기 분열적인 고민에 빠져 있는 사춘기 소년으로 자신의 삶과 가치가 일치하는 이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분열적인 정체성에서 나오는 창조적인 자아를 지키고 싶어 한다. 사춘기 시절 나는 나의 정체성을 토니오 크뢰거에 투사했던 것 같다. 토니오처럼 사람들의 세계를 떨어져서 관찰하고 세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에 대해 찾아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여겼다. 

나는 1남 4녀 가운데 셋째로 자랐다. 부모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춘기 때는 나를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무엇에 대한 열등감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어쩌면 너무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지적 호기심이 강했다. 학교 공부를 공부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을 이해하려면 교과서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지고 싶은데 못 가진 것에 대한 욕망을 숨기기 위해 미리 포기해버리고, 욕망도 숨겼다고 분석할 수 있다. 나이 들면서 그런 게 뭔지 알게 됐다. 나는 내 삶과 내 생각과 나의 세상이 일치하지 않는 분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춘기와 대학시절을 보냈다. 분열적인 사고를 했기 때문에 법률가가 되는 것을 더 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판사는 창의적인 직업이 아니다. 판사는 창의적이면 실패한다. 그러나 대법관은 해석의 기준을 만드는 자리다. 입법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데, 이를 해결하는 자리다.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으므로 비교적 창의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무슨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늘 고민한다. 대법관을 그만둔 뒤 강의 요청이 많았다. ‘판사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법률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주제의 강의를 준비하면서 관련 책을 읽었다. 마사 누스바움 시카고대 로스쿨 철학교수가 쓴 ‘시적 정의’라는 책을 보면 판사의 판결 기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누스바움은 판사의 역할을 “소설을 읽는 독자”에 비유했다. 독자는 소설을 읽을 때 사건을 겪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소설 속 사건을 비판적으로 보는 존재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저러면 안 되는데…’ 이런 감정으로 주인공의 행동을 판단한다. 법률은 획일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는 것 같지만, 법률 속에 획일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개인의 삶이 있다. 같은 절도죄라고 해도 범죄 동기는 개별적으로 다르다. 살아온 인생이 다르고 절도 방법이 다르다. 판사는 개개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개별성과 보편성을 잘 포괄하는 사람이 훌륭한 판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인생에서 책 읽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정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직업과 전혀 무관한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책들이 내가 세상을 바라본 시각과 내가 내린 판결들에 다 녹아 있음을 깨달았다. 

김영란(법학75-79)
전 대법관·서강대 석좌교수
‘부정청탁금지법’ 발의자로 유명한 김 동문은 독서광으로 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지난해 여름 ‘책읽기의 쓸모(창작과 비평사)’를 펴냈습니다. 위 글은 ‘책읽기의 쓸모(창작과 비평사)’와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독(讀)한 습관’ 강연회 내용을 재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