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호 2024년 10월] 기고 에세이
교직원의 소리: 피라미드 게임
탁장한 모교 사회복지학과 강사
피라미드 게임

탁장한 (사회복지10-14)
모교 사회복지학과 강사
학창 시절, 성적 상위권 친구들과 유독 거리를 두었다. 경쟁심도 있었지만, 비평준화 지역의 최상위 고등학교에서 머리가 가장 큰 그들이 선생님과 동급생을 가리지 않고 보이는 무례에 대한 환멸이 더 큰 이유였다. 그렇다고 순종적인 친구들을 썩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이상하리만큼 난 교실에서 가장 소외된 친구들, 남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놀리는 녀석들과 친했다. 분명 둘 다 기분 나쁜 ‘무례함’인데 약자의 그것은 이해되는 내 언더도그마는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누구보다 잘나져서 남들이 나를 괴롭히는 피라미드 게임을 벗어나겠다며 억척스레 공부했는데, 정작 그렇게 벗어난 자리는 여전히 나의 것인 듯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회고해 보면 동질감에 기반한, 약자에 대한 애착의 이면에는 서열 체제에 대한 반골 기질이 잠재했던 것 같다. 그러나 폭력의 피라미드 구조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칠수록 나의 성적은 올랐고, 고민하던 문제는 처리되지 못한 채 난 모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는 내게는 모순의 연장선이었다. ‘가장 높은 성적’과 ‘약자에 대한 관심’이 공존하는 위치라는 점에서. 이후 나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한없이 약함으로써 무례한 강자들과 다른 존재가 되는 방식으로 모순을 처리했다. 아니, 처리한 줄 알았다.
지난 학기 모교에서 첫 강의를 시작하며 사회복지학과 학생들과 마주했다. 고교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수강생들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나와는 친하지 않은 성적 최상위권의 존재이지 않은가. 학기 초반부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선량해 보이나 자꾸 이면의 무례함이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그들을 강자라고 인식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쉽게 마음의 문을 닫을 수는 없었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과학을 접한 이상 ‘사회적 가치를 고민하는’ 강자가 되지 않으면 마음에 부담이 되는, 그러나 약자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존재론적으로 약자와 점차 멀어져가는’, 그렇게 의도와 비의도 사이에서 철저히 누구와도 이질적인 존재로 살아내야 했던 고단한 내가 학생들의 눈망울에 비쳐서였다. 지친 표정에서 암시되는 험난했을 20대들의 곤고함이 마음에 들어왔다.
수업을 통해 쉼을 주고 싶다. 피라미드를 착실히 올랐으나 남들에게 뒤처질까 심히 두려워하면서도 뭔가 다른 가치를 얻길 원하는 그 갈망을, 숱하게 굶주려 본 선배는 최대한 채워주고 싶다. 그러나 확실히 해두자. 내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내야 할 ‘뭔가 다른 길’이란 더 정의로운, 합리적인, 자비로운 일을 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 역설적이지만 그 무엇을 하든 우리 존재에 각인된 피라미드라는 잔혹한 한계와 마주해 밑바닥까지 절망하고 모순을 끌어안는 것으로부터 지평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