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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호 2023년 10월] 기고 에세이

심플 미묘한 사제관계 ‘아카데믹 프렌드십’


교직원의 소리

심플 미묘한 사제관계 ‘아카데믹 프렌드십’



김태영
대학원08-10
모교 정치외교학부 강사


한 학기 강의를 시작할 때면 수강생들과의 만남이 지니는 농도와 밀도를 생각해본다. 가령 3학점짜리 교양 과목을 맡아 15주 정도의 강의를 진행한다 치면 대략 45시간의 만남이 보장(?)된다. 일수로 치면 이틀 정도를 함께 지내는 셈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만남이다.

하지만 빈도를 따지자면, 만남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3개월 동안 같은 시각, 같은 공간에서 매주 만나 두세 시간을 함께 하는 셈이니 결코 스쳐 지나는 가벼운 만남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수 십년지기 초등학교 동창도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만나지 않나.
더구나 학생들과의 만남은 꽤 입체적이다. 그들의 얼굴을 만나고, 말을 만나며, 심지어 수 페이지에 달하는 리포트 과제를 통해 그들의 글을 만난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 청년의 자살, 비혼과 출산율 저하와 같은 자못 심오한 사회문제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말과 글로 주고받는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나는 내 아내에게(아내 또한 나에게) 2000자가 넘는 긴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다.

어느 학생의 은밀한 프라이버시를 알게 될 때도 있다. 자신의 심각한 만성질환이 악화되어 출석을 못하게 되었다며 조심스레 건강진단서를 내밀고는 조금은 쑥스럽게 웃는다. 비밀을 지켜달라는 의미 아닐까.

종강 이후 수개월이 지나 그 학생을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순간 조금은 미묘한 기류가 감지되기도 한다. 분명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인데, 비밀까지 공유했던 사이인지라 내심 반갑기는 한데, 이 친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학생도 나에게 인사를 할까 말까 잠시 난감해 한다. 아마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이 선생님이 나를 기억하기는 할까, 내가 인사를 했는데 몰라보는 건 아닐까. 혹시 내 비밀을 아직도 기억하는 건 아닐까.

이럴 땐 그저 그에게 옅은 미소를 보낸다. 그제서야 학생도 살짝 묵례를 보낸다. 건강은 좀 나아졌냐고 묻고 싶지만 참는다. 별다른 인사말을 건네진 않지만, 그래도 새로운 수업에서 재회하기를 내심 기대해본다. 나는 이런 심플 미묘한(?) 사제 관계를 아카데믹 프렌드십이라 정의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