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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2018년 11월] 문화 나의 취미

“부자들의 글씨는 ‘ㅁ’을 꽉 닫는 경향이 있습니다”

국내 첫 필적 연구가 구본진 로플렉스 대표변호사


“부자들의 글씨는 ‘ㅁ’을 꽉 닫는 경향이 있습니다”


국내 첫 필적 연구가
구본진 로플렉스 대표변호사




구본진(사법85-89) 로플렉스 대표변호사가 명함을 건네왔다. 반듯하게 찍힌 활자 사이를 비워놓고 이름 석 자를 큼지막한 손글씨로 쓴 명함이었다. 필적을 연구한다는 그를 찾아오면서 ‘못난 내 글씨를 숨기리라’ 다짐한 터였다. 그는 말한다. ‘글씨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구 동문은 국내 최초의 필적 연구가다. 본업은 아니지만 본업 못지않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얻은 타이틀이다. 사법시험(30회) 합격 후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장, 울산지검과 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 수원지검 성남지청장 등 20여 년간 검사 생활을 하고 2015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그동안 필적 분석은 업무로 인해 시작한 취미에서 관련 책을 두 권이나 낼 만큼의 경지로 발전했다. 지난 10월 29일 삼성동 로플렉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수사 과정에서 피조사자에게 자필 진술서를 쓰게 했어요. 내용을 보면서 수사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였는데 특이한 성격의 사람들은 글씨체도 뭔가 특이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글씨체를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죠.”

영어 필적학 책을 구해 본격적으로 글씨 분석을 공부했다. 서양은 필적학이 발달해 있어 미국에는 필적학회, 영국에는 필적학자협회가 있고 구 동문도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서양은 ‘i’나 ‘t’ 같은 글자 하나에 수십 가지 분석이 정립됐어요. 가장 분석이 많은 ‘t’의 경우 가로획을 높게 쓰는지, 비스듬한지 등을 모두 따집니다. 그에 비하면 한글은 연구가 미흡해요. 부자들은 ‘ㅁ’을 꽉 닫아 쓰는 경향이 있다거나, ‘ㅎ’이나 ‘ㅊ’의 머리 삐침을 길게 찍으면 최고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등 거칠게 정리는 해뒀죠. 계속 연구해야 해요.”

그가 글씨를 분석하는 기준이 있다. “특이한 사람이거나, 특이한 글씨거나”. 대표적인 연구 대상이 항일운동가들이다. 20대 초반부터 고미술품 수집에 눈을 떠 항일운동가들의 글씨를 모으고 비교 대조군으로 친일파와 일제 침략자의 글씨도 모았다. 유묵의 진위 여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각 그룹 간 글씨의 특이점을 발견했고, 그 결과를 정리해 책 ‘필적은 말한다-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을 냈다.

“항일운동가 600여 명의 친필 800여 점에 친일파의 글씨를 합해 1,000점 넘게 소장하고 있어요. 나중에 디지털 아카이브화해서 무료 공개할 계획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먼저 생각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찬사죠.”


구본진 동문이 필적을 주제로 낸 두 권의 저서



저서 ‘어린아이 한국인’에선 고대 한국인의 글씨까지 거슬러 올라가 한국인 특유의 생기발랄함과 순수한 성향을 짚어내기도 했다. 그가 생각하는 ‘잘 쓴 글씨’의 기준은 균일함이나 단정함이 아니다. 생명력 있고, 글씨의 주인이 추구하는 인간상이 보이는 글씨를 최고로 친다. “모든 글씨엔 약점이 있어요. 그런 약점까지 보완해서 조화를 이루는 글씨가 있죠.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과 정약용, 정조의 글씨가 그래요. 자유의 최대한을 누리면서 방종까지는 가지 않는 글씨랄까요. 타이거 우즈의 글씨도 굉장히 용기 있고 호탕하지만 정밀한 면이 보여요.”

지난 본회 특별전시회에 방문한 이낙연 총리의 방명록. 구 동문에게 간단한 필적 분석을 부탁했다.




자와 분도기를 사용해 세밀하게 글씨를 분석하기 때문에 적잖은 힘이 든다는 그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글씨 한 장을 내밀었다. 얼마 전 본회 특별전시회를 방문한 이낙연 국무총리의 방명록이었다. 초견으로 내린 평. “좋은 글씨네요.”

“생동감 있고, 미적으로도 아름답네요. 생각보다 각이 많은 걸 보면 부드럽기만 한 사람은 아닙니다. 용기 있고 바른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이처럼 언론 등의 의뢰를 받아 역사적 인물과 CEO 등의 필적을 분석하고 발표할 때가 많다. “필적학을 사주풀이, 미신 취급하는 반응도 많이 겪었다”는 말에서 아쉬움과 피로감이 느껴졌다. “‘인물 정보를 알고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어요. 있을 수 있는 의문이죠. 수만명의 글씨를 봤고, 인터뷰나 기고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발표한 분석만 수백 건입니다. 전체적으로 논리가 일관돼야 하는데 끼워 맞추기만 할 수 있을까요. 유명인이라도 잘 알려지지 않은 내면을 글씨로 짚어낼 때가 많습니다.” 검사 시절 피의자의 글씨 분석과 수사 결과를 대조한 ‘블라인드 테스트’가 대부분 성공했다는 것도 그의 확신을 뒷받침한다.

구 동문은 “글씨가 사주와 다른 점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글씨만큼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내면을 바꿀 수 있는 수단이 없어요. 옛 사람들도 자기 수양을 위해 글씨를 썼잖아요. 저는 넓은 의미의 ‘수양’보다 일이나 공부를 잘하고 싶다거나 소통을 잘하고 싶다는 식으로 되고 싶은 인간상을 구체적으로 정해서 그에 맞게 글씨를 연마하면 삶이 그렇게 바뀐다고 주장해요. 막연히 잘 쓰는 사람들의 글씨를 따라 쓰는 게 의미 없는 이유입니다.”

그는 글씨로 삶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책을 준비하고 있다. 고미술품을 수집하며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요하 문명의 일종인 홍산문화가 한국과 관련 있음을 보여주는 영문 서적도 낼 예정이다. 법학과 졸업 이후 구 동문은 모교에서 지적재산권법(예술법)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수현(의류88-92) 전 영진전문대 패션디자인과 교수와 동문 부부다. 인터뷰를 마친 후 들려준 반가운 소식. 딸 구도윤 씨가 2019학년도 입시에서 모교 경영대에 합격해 동문 가족을 이뤘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