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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호 2018년 5월] 문화 나의 취미

나의 취미생활: 펜화가로 데뷔한 박재갑 한국세포주연구재단 이사장

“평생 칼 잡아온 외과의, 펜 잡는 재미에 빠졌죠”

“평생 칼 잡아온 외과의, 펜 잡는 재미에 빠졌죠”

펜화가로 데뷔한 박재갑 한국세포주연구재단 이사장


박재갑, 인왕산 까치와 호랑이. 종이에 잉크펜, 30×42cm, 2018.



인왕산 준봉 아래 맹호가 두터운 네 발을 짚고 걸어온다. 바짝 선 터럭, 치켜든 등허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주변을 맴도는 까치 두 마리. 몸집은 작지만 되레 용맹하게 느껴진다. 이 모두가 0.03mm 굵기의 펜선 수십만개로 표현됐다. ‘인왕산 까치와 호랑이’라는 제목의 이 펜화 그림은 박재갑(의학67-73) 한국세포주연구재단 이사장(모교 의대 명예교수)가 지난 4월 펜화가협회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다.

“호랑이는 임금, 까치는 백성입니다. 하늘을 날 수 없는 임금보다 백성이 위대하니, 백성을 어려워 하라는 뜻을 담았죠.”

4월 24일 연건동 서울대병원 내 한국세포주연구재단에서 만난 박 동문은 친절하게 그림의 뜻을 설명했다. 이사장실 대신 칸막이 없이 터놓은 구조 속에 그가 쓰는 공간을 겸한 작업실이 있었다. 의학 서적과 수많은 상패들 사이에 직접 그린 작품들이 즐비했다. 사진같이 정밀한 유화와 곱게 채색한 민화, 판화, 최근작인 펜화와 펜담채화까지.

‘대장암 명의’로 알려진 그다. 1981년 모교 의대에 부임해 외과의사의 길을 걸으면서 모교 암연구소 소장과 국립암센터 초대·2대 원장, 국립중앙의료원 초대 원장, 세계대장외과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미술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2011년 국립중앙의료원장직을 그만두고 온 그에게 아내가 ‘아이들 방학숙제 도와줄 때 보니 소질이 있더라’며 그림 배우기를 권했다. 곧바로 둘째 딸이 그림을 배우던 홍익대 평생교육원을 찾았다.

“2년간은 유화와 혼합재료 그림을 배웠어요. 그 다음엔 동양화를 전공한 제자의 딸에게 비단채색을 배우고, 민화의 대가 송규태 화백 밑에서 4년 넘게 민화를 그렸습니다. 민화엔 좋은 일을 축원하는 뜻이 있고 은유가 담겨 있죠. 그래선지 제 그림엔 민화의 콘셉트가 녹아 있어요.”

“그림 속에 영지버섯, 해바라기, 달맞이꽃, 목화, 오죽 등을 심었는데 각각에 숨은 뜻이 있다”는 그의 설명이다. 가령 오죽은 박 동문의 15대 선조 박광우 선생이 부사를 지낸 강릉을 상징한다. 그림에 들어가는 요소들은 실제 사진을 휴대폰에 넣어놓고 오랫동안 관찰해서 그려냈다.

“주인공인 호랑이 이미지를 구하는 데만 3년 이상 걸렸어요. 국내 동물원에서 호랑이 사진을 마음에 드는 포즈가 나올 때까지 계속 구했죠. 구도가 결정된 후에는 아예 저녁 도시락을 싸들고 나와서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작품마다 찍힌 ‘평암(平岩)’이라는 낙관도 그가 직접 전각과 서각을 배워 만든 것이다. 동기 박상철 교수가 지어준 그의 호로 ‘암을 평정했다’는 의미도 담겼다. 



서각 작업대 앞에 앉은 박 동문. 그는 림에 찍을 낙관을 손수 만들기 위해 전각과 서각을 배웠다. "조그만 도장방에서 여러 번 도장을 파면서 친해진 주인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았다"고 했다.



작업실 한 쪽 서각 작업대 위의 목판엔 겨우내 매달렸다는 훈민정음 언해본 첫 장이 새겨져 있고 깎아낸 나뭇밥이 한켠에 수북했다. “조각도에 많이 다쳤겠다”고 묻자 “평생 칼을 썼는데…” 하며 너털웃음을 지은 그는 서각 작업할 때 쓰는 것이라며 손때 묻은 루페(수술용 확대경)를 보여줬다. 전임강사 시절 실험쥐의 가는 혈관을 문합하는 실습훈련을 할 때 썼던, 추억 어린 물건이다.

지금의 세포주은행도 그 때부터 태동했다. 당시만 해도 생명과학연구의 필수 소재인 세포주는 모두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는 처지였다. 박 동문은 1984년 처음 한국인 위암환자의 세포주를 개발하고 대장암 등 수백 종의 세포주를 개발했다. 1번에서 시작한 ‘SNU 세포주’가 지금은 4,800번대에 이른다. 수립된 세포주들을 기반으로 1987년부터 한국세포주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세포주은행이 세계 세포주은행 중 암세포주로는 두 번째, 전체 세포주로는 네 번째 규모예요. 세포주에 대한 국내·국제특허를 출원하기 위해선 이곳에 그 세포주를 기탁해야 하고, 제약·식품회사와 대학 등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곳은 대부분 이곳에서 필요한 세포를 받아가고 있습니다.”

연구자로서 이룬 업적이 태산이지만 환갑을 넘겨 시작한 미술은 이제 시작이다. “하고 싶은 게 많다”며 숨차게 계획을 쏟아내는 그의 최종 종착지는 수묵화다.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겐 수묵화가 최고 경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먹과 붓만 써서 생각하는 걸 표현해보고 싶어요. 펜화는 한두 점만 더 그릴까 해요. 애국가에 착안해서 남산 위에 소나무와 학이 어우러진 송학도를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할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평생 그림 그릴 체력은 자신 있다. 2014년 시작한 자전거 라이딩이 최근 통산 1만km를 돌파했다. 금연운동에도 앞장서 지난 4월 6일 보건복지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미디어 흡연장면 금지, 군 면세담배 폐지, 담뱃값 인상, 금연시설 지정 등 국가 금연 정책과 제도를 발전시키고 국내 암 연구 발전에 공헌한 공로다.

“열정이 있다면 누구나 그림에 취미를 붙일 수 있다”는 박 동문. 그의 그림을 보고 싶다면 모교 병원을 유심히 둘러보자. 서울대병원과 어린이병원, 암병원 로비를 비롯해 다섯 군데에 무상 대여한 작품이 걸려 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