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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2018년 1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국제형사정의의 새로운 변화

송상현(법학59-63) 유니세프한국위원장·제2대 국제형사재판소장

국제형사정의의 새로운 변화


송상현(법학59-63) 유니세프한국위원장·제2대 국제형사재판소장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인류는 다시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세계대전을 방지하고 세계평화를 누리고자 유엔을 창설하였다. 유엔은 국제사법재판소와 안전보장이사회의 집단안전보장체제라는 두 가지 수단을 가지고 그동안 불충분하나마 세계평화를 잘 유지하여 왔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주로 국가간의 분쟁이 발생한 경우 총칼을 드는 대신 재판을 통하여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주는 사법기관이다. 안보리의 집단안전보장체제는 한국전쟁 당시의 군사개입이나 최근의 각종 집단제재에서 볼 수 있다시피 그 나름대로 국제사회에서 전쟁억제와 평화유지기능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전후 70여 년 동안 유엔의 이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부족하고 성에 안차는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유엔의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가동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경우에도 그 전쟁을 일으킨 주범을 처단하여 응보적 정의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즉 유엔의 군사개입이나 외교적 노력을 통하여 평화와 안전을 확보한 경우에도 전쟁이나 집단학살의 책임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부정축재한 재산을 가지고 여생을 편안하게 보낸다면 인류의 양심과 정의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것이 인류의 염원인 국제형사재판소가 탄생한 배경이고 필요성인 것이다. 국제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 전범재판소를 설치하여 전쟁범죄자들을 단죄함으로써 최초로 개인을 국제법정에 세워서 수사와 처벌을 할 수 있는 선례를 만들었다. 그 후 영구상설의 국제형사재판소를 창설하자는 논의가 반세기 이상 있어왔고 마침내 1990년대에는 구 유고전범재판소와 르완다학살재판소라는 유엔 산하 임시형사법정이 설치되어 상당한 평화 확보의 실적을 올렸다.

이와 같은 논의와 선례를 바탕으로 로마규정이 채택되었고 2002년 7월 1일 드디어 헤이그에서 국제형사재판소가 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이 재판소는 유엔시스템과는 별도로 국제사회의 평화를 가장 심각하게 저해하거나 위협하는 네 가지 극악무도한 범죄, 즉 전쟁범죄, 침략, 집단학살 그리고 반인도적 범죄의 수사와 처벌에 관한 관할권을 갖고 이를 저지른 수괴급 범죄자를 처단할 수 있게 되었다. 2011년에 출간된 세계은행보고서에 의하면 중규모의 개도국이 내전으로 인하여 입는 평균 피해액은 30년간 그 나라의 국민소득성장과 맞먹고 보통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20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 경우 부당면책만 계속되면 이는 피해자 측의 복수심을 유발하여 끊임없는 충돌의 원인이 되므로 확실한 책임추궁을 하여 일단 법의 지배의 닦는 것이 전쟁을 겪은 사회가 다시 빨리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회복하는 지름길이 된다.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권은 회원국에만 미치므로 북한과 같은 비회원국에는 해당이 없으나 유엔안보리가 결의를 하면 비회원국이라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되어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비회원국인 북한의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자는 논의가 꾸준히 대두되는 이유다. 다만 정치적으로 중국이나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회부가 불가능하므로 다른 대안을 찾고 있는 것이 국제사회의 현재 움직임이다.


개도국이 내전으로 인해 입는 평균피해액
30년간 그 나라의 국민소득성장과 맞먹어
회복에는 20년 이상 걸려


우리가 국내외에서 운영하는 통상적 의미의 형사법원은 범인을 처벌하여 응보적 정의를 구현하면 그 임무가 종료되고 만다. 그러나 국제형사재판소는 범죄수괴 개인의 처벌이라는 기초적 형사정의만으로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가 충돌과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수많은 전쟁피해자의 고통은 전연 개선되지 않는 점에 착안하여 로마규정에 두 가지 혁신적 방안을 도입했다. 첫째는 피해자가 독자적으로 형사절차에 참가하여 거의 당사자와 비슷한 수준의 각종 소송행위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다소나마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길을 열었다.

둘째로 국제형사재판소는 피해자를 위한 신탁기금을 마련하여 적극적으로 그들을 구제하고 지원하는 각종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수많은 전쟁피해자들에게 날마다 직업훈련과 의료봉사는 기본이고, 강간피해자를 위한 지속적 심리상담, 어린이교육프로그램운영, 사지를 잃은 피해자에게 의수족의 공급, 평화교육, 생업정착을 위한 미소금융 등 다양한 구제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취약한 피해자집단은 어린이와 부녀자들이다. 어린이들은 대부분 소년병으로 정신적, 신체적 상태가 온전치 못하고 부녀자들은 영유아가 딸린 젊은 과부들이 대부분이다. 피해자신탁기금은 이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유니세프와 같은 유엔 산하 각종 원조기관과 현장에서 협력하면서 이들을 돕는다.

바야흐로 국제형사정의는 이처럼 처벌을 통한 고전적인 응보적 정의에서 훨씬 더 나아가서 회복적 정의와 치유적 정의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가 단순히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처벌에 그치지 아니하고 피해자 구제까지 해주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법원이라는 점에서 국제형사재판소의 창설은 인류가 간직해온 오랫동안의 소망이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국제형사재판소가 앞장서서 시도하고 있는 응보적 정의의 실현을 통한 부당면책의 종식은 물론 회복적이고도 치유적 정의로 과감하게 확대해나가는 이 숭고하고도 어려운 실험은 결코 실패해선 안된다. 그래야만 국제형사재판소는 유엔의 두가지 분쟁해결수단과 상호보완하여 좀더 확대된 국제형사정의를 통한 인류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보루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