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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호 2016년 8월] 기고 에세이

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 기고문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

 


김인호(61-65)한양대 명예교수·Dynamic Management Society 회장

 


정년(停年)을 맞아 잠시 뒤를 돌아보려니, 문득 서울 상대를 지원하게 된 연유가 새삼 다가온다. ()3 내내 이과(理科)반을 듣고서 느닷없이 문과(文科)인 상대(商大)로 왔기에 말이다.


원래는 온순한 성품이었으나 초등학교 6학년 때 여윈 모친의 사랑 결핍(?)으로 다소 난폭해진 성격 탓에 사고치는 바람에 고3 여름방학 하던 날 (당시엔 이날이 고3의 대입특강이 시작되는 첫날이었음) 무기정학(無期停學)을 당해 50일을 열외가 되다보니 대입지원서 작성 시 가장 중시되는 고3, 2학기성적이 엉망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의예과 아니면 서울 공대 화공과나 기계과를 써달라는 나의 막무가내와 이 점수로는 서울대 어떤 과에도 못 간다는 담임선생님과의 승강이 끝에 자네 상대가면 어때?’하는 급작스런 제의에 선택 과목이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문과인 상대를 갈 수 있느냐고 항변하자 나의 선택과목인 화학과 생물을 가지고도 서울 상대에 응시가 가능하다며 지원서를 써주셨던 선생님.


전형조건이 그 전해의 것과 같을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상대 지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상대는 애초부터 전혀 고려조차 않고 있었던 터였다.


기실 그 전()해뿐만 아니라 그 다음 해부터도 또다시 안 되게끔 다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해엔 어쩐 일로 가능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분명 어떤 손길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일순간에 이과에서 문과로 나의 행로가 180도 바뀌었고, 이후 대학생활은 우리 모두가 그러했듯이 당시의 혼란한 사회분위기 덕에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4년을 얼렁뚱땅 마치게 됐다.


나는 곧장 국방의무를 보다 충실하게(?) 다하고자 공군장교 코스를 택했다.


소위(少尉)로 임관된 지 4개월여 쯤 되던 어느 날 국군의 날 행사 일환으로 당시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삼군사관학교 종합체육대회의 응원단원으로 차출되어 응원을 마치고 공군장교버스를 타고 오산으로 귀대하던 중 수원 세류동 건널목에서 내가 타고 있던 공군장교 버스가 서울발 하행열차에 박치기 당해 3명의 장교가 즉석에서 죽고 약 오, 육십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난 얼굴과 몸이 묵사발이 되었는데도 피가 안 나는 바람에 경상자 축에도 끼이지 못할 만큼 운이 좋았던 몇몇 장교 중 하나였다.


몇 십 미터 열차에 끌려가며 구겨지는 버스 안에서 순간 ,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어릴 적부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온 긴 대목이 일순간에 쫙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묘한 체험을 잊을 수가 없으며 이는 나로 하여금 그 후 지금까지도 우리 삶과 또 우리의 기억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기게끔 해 준다.


아무튼 그때 그 사고는 당시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많은 사유의 계기를 던져주었다. 그때 그 충돌사고는 과연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물론 사고가 난 다음에 생각이 미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탄 장교버스와 그 기차는 노량진역을 지날 때에도 나란히 같이 가고 있었고 또 안양으로 진입하는 구름다리 위에서도 같이 마주쳤던 것이 아무래도 우연 같아 보이질 않았었다.

우리 눈에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만사가 필연 아닐까,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등등. 어느 문학도의 여유로운 넋두리가 아니라 당시 나에겐 대단히 심각한 현안(懸案)이었다. 요컨대 당시의 그 사고는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큰 계기가 됐다.


사고 후 몇 달이 지나 사고후유증이 거의 가시어 갈 무렵 6.25 피난 시절 대전에서 같이 초등학교를 다녔던 한 여학생과의 우연한(?) 상봉에서 그녀가 제일 먼저 던진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는 물음은 이런 나의 사유를 더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


삶과 죽음의 견지에서 볼 때 내 생명이 내 의지로 또는 내 부모의 뜻에 따라서 생성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 또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 한, 적어도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가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는 추론(推論)을 당시 난 쉽게 받아들이고 있던 터이었으므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합의가 이루어진 두 젊은 남녀는 그래서 자연스레 아무 장애 없이 그 이후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난 공군 제대를 2, 3개월을 앞둔 어느 날 내 근무지였던 공군본부로 찾아온 어느 선배의 스카우트 아닌 스카우트로 KIST에서 첫 직장을 시작하게 됐다. 이과를 듣고도 상대를 다녔던 내가 첫 직장을 이과의 본산인 KIST에서 시작하게 된 것도 과연 우연이었을까? 난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KIST에 입소한 그 해 늦가을 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단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 집안인 처갓집의 요구대로 성당에서 관면혼배라는 것을 했고 또 일반 예식장에서도 결혼식을 올리는 등 두 번의 행사를 거쳐 드디어 원하던 가정을 꾸리게 됐다.


뒤이어 제왕절개로 힘들게 얻은 첫 아들은 나에게 또 한 번 생명의 신비와 생명의 주관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새롭게 해 주었다. 양수과다증이라는 특이한 상황에서 태어난 첫 아들은 식도(食道)가 위()가 아닌 기관지(氣管支)와 연결되어 있는 태중(胎中)에서부터 기형(畸形)이었던 것이다.


기형이란 사실을 처음 알려주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까무라쳤고 잠시 후 깨어났는데 깨어나는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내 죄 때문에 저 애가 내 벌을 받고 저렇게 태어났구나,’라는 죄의식(罪意識)이 내 인생 안에서 최초로 강력하게 밀려왔다, 사실 난 그 전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죄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천방지축의 생활을 해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술시키겠다며 울부짖는 나를 진정시킨 병원 측의 말은 수술성공률은 제로이며 애를 수술시킨다는 것은 자기네에게 애를 실험용 재료로 내주는 일일뿐 아니라 수술비용도 퍽 많이 들므로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충고였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열고 의논한 끝에 결국 병원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며칠 후 졸지에 배를 가르고 첫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에 차 있던 산모의 충격을 달래며 빠른 퇴원수속을 밟던 중 이미 세상을 떴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접한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네가 뭔데 감히 한 생명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느냐?’는 음성에 난 성공 가능성이 제로일지라도 수술시키기로 결정했다. 수술을 서두르는 나에게 그 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아무리 서둘러도 월요일이라야 수술이 가능하다며 집도 의사가 던진 또 한마디 말, ‘수술은 내가 하지만 애가 살고 안 살고는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란 당시엔 퍽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술은 잘 됐다고 했다. 그간 동일한 수술에서 제일 오래 산 아이의 기록이 2주일이었는데 2주일이 지나자 국내 기록을 깼다는 것이다. 40여일이 지나자 이 수술은 국내 최초의 성공이라며 퇴원시켜도 좋다는 집도 의사의 말에 따라 집으로 데려 온 아이는 아주 강건하진 않았지만 보통아이처럼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로 정상아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멘탈(mental)면에서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내 맘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불안감을 달랠 겸 또 생명의 주관자(사실 난 그때 소위 때의 교통사고와 첫 애의 탄생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존재케 하는 주관자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도 인정할 겸 해서 난 집 근처의 성당 신부를 찾아갔다.


왜 왔느냐는 신부님의 물음에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 왔다고 답변하자 신부님은 앉기를 권한 후 양주 한 잔을 건네며 느닷없이 엄숙한 어조로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입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머뭇거리는 나에게 재차 묻자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났던 한 청년으로 알고 있습니다.’하자 그러면 그 분이 우리와 다른 게 뭐라고 생각하시오?’ 하며 연이은 질문에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인성(humanity)을 지닌 인간인 동시에 또한 신으로서 신성(divinity)도 지닌 분으로 듣고 있습니다.’란 나의 답에 내일 모레 오시오. 내가 영세를 주겠소. 올 때 본명(세례명)이라는 걸 하나 지어갖고 오시오하며 가도 좋다고 했다.


물론 당시엔 몰랐지만 그 분은 벨기에에서 신학을 공부한 좀 트인(?) 분이었던 것을 후에 알게 됐다.

내가 그 옛날 서울고를 다닐 때 광화문 코너에서 언젠가 보았던 국제극장의 영화 간판에서스테파노의 세레나데란 뮤지컬 영화 제목이 퍼뜩 떠오르길 레 본명을 스테파노로 정하고 영세를 받게 됐다.


이는 최소 6개월 이상 교리공부를 거치지 않으면 영세를 주지 않던 당시의 관례로 본다면 난 분명히 엉터리로 영세를 받은 것이고 또 그 신부님은 엉터리로 영세를 주신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공군 소위 시절 당한 교통사고와 제대 후 결혼과 첫 애의 태어남과 포기, 그리고 그 다음 수술성공으로 인한 재탄생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던 젊은 날의 나와는 달리 생명의 원천이 어디이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존재가 누구이신가의 관점에서 만물을 만드시고 섭리(攝理)하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을 우리가 자유의지(free will)로 어기는 것이 죄이며,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 지은 만큼 벌을 받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꽉 차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의의 견지에서 우리가 지은 죄가 사하여 지려면 반드시 죄 없는 존재가 내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대속(代贖: redemption)의 논리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바로 육화(incarnation)되어 오시어 우리 죄에 대한 대속 제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따라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어떤 죄도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명쾌한 논리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 지식의 원천임을 알게 된 나에게 그 분은 커다란 은총으로 내가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교직(敎職)을 천직(天職)으로 주셨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당시 보이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미국이 1960년대 초반 수정(修正) 헌법을 통해 도덕다원주의(moral pluralism), 그리고 거의 같은 기간에 영적세계의 중심인 로마가톨릭교회가 2차 바티칸공의회(The 2nd Vatican Council)를 통해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수용하자 더욱 기승을 부리며 판을 치는 대 혼란의 격랑 속에서 미국 사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야 말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relativism)의 최대 피해자임을 교직기간 동안 확인할 수 있는 눈도 주셨다.


그래서 난 내 전공영역인 경영전략과 기업윤리에서 뿌린 대로 거두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엄존함을 근거로 상대적 가치판단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에 입각한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인다이내믹 매니지먼트(Dynamic Management)'를 정립할 수 있었고 이를 아마존닷컴과 해외학회에서의 발표 세미나 특강을 통해 세계석학들과 교류하며, 세계유수출판사 Wiley-Blackwell 경영백과사전에도 등재되고, 중국 북경대, 난까이 경영대학에서 MBA정규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세계 경영학계와 산업계에 보급 확산시킬 수 있는 토양도 갖추게끔 해주셨다.


정년을 맞을 때까지 어느새 훌쩍 지나버린 50여년의 세월은, 인간은 자기의지로 뜻을 세우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는 온전히 하느님 의지에 따라 정해진다는 사실을 터득케 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첫 애가 잘못 태어났을 때 내 죄 탓임을 인정하고 통회(痛悔)하던 마음을 보시고 아들을 살려주셨음 같이 낮춘 마음을 그 분은 아니 낮추어보신다는 성경의 경구도 참임을 굳게 받아들이게끔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귀하기 때문에 나는 세상의 지혜 지식을 우습게 여긴다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온전히 이해되어진 값진 세월이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누구든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낮출 때라야 하느님께서 천상은총을 듬뿍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순간 죄를 성찰(省察)하며 만물을 만드시고 보전하시며 다스리고 계시는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인호(金寅鎬) (서울상대 19, 61-65)


지난 40여년간 KIST와 한양대에서 세계 산업주도권이동에 대한 실증연구를 통해 Dynamic Management 이론을 구축?확산시키고 있는 석학. 현재 이 이론은 중국 북경대와 천진 난까이(Nankai)경영대 석?박사 정규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한국경제발전을 견인해온 재벌구조 Chaebol Structure 에 대한 Dynamic Management관점의 진화논리가 Wiley Encyclopedia of Management를 통해 전 세계로 보급중임. 주요저서로는 Dynamic Enterprise Strategy (Peking Univ. Press, 2013)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 (Lambert Academy Publishing, 2010), Dynamic Management Theory (Hanyang Univ. Press, 2008) 다이나믹 매니지먼트과 기업일반이론 (비봉출판사, 우수학술도서) 세계 산업주도권 이동원리(한국경제신문사, 삼성맨 필독서) 기업파워는 어디에서 오는가? (한국경제신문사, 7회 전경련 자유경제출판문화상, 1996)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