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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호 2016년 8월] 기고 에세이

김종길 전 부산해운항만청장 에세이

아이고! 불쌍한 내 발
아이고! 불쌍한 내 발


김종길(ACAD 18기) 전 부산해운항만청장


점심을 먹고 일어서다 밥상에 발등을 부딪쳤다. 통증이 왔다. 발등과 발가락이 부어올랐다. 잉크를 뿌려놓은 듯 온통 퍼렇게 멍들었다. 진통제를 먹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흘째 되는 날, 이대로 두었다가 가래로 막을 것 같아 불안했다. 정형외과에 갔다. 발을 눕히고, 세우고, 옆으로 자세를 바꾸어가며 엑스레이를 여러 장 찍었다. 판별이 안 된다며 CT를 찍으란다. CT에도 별다른 증상이 없다. 

병원들이 경쟁적으로 고가의 의료장비를 들여다 놓고 과잉진료를 하는 느낌이다. 그 몫이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온다. 병원 대기실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영상을 계속 내보낸다. 의학상식, 예방의학 등 환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는 없고 오직 병원 광고뿐이다. 돈 냄새를 물씬 풍겨 씁쓸하다.

의사가 깁스를 하란다.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깁스를 하고서 목발 짚고 다닐 내 모습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보다도 깁스에 갇힌 발이 얼마나 갑갑해 할까란 생각이 든다. 거절했다.

모임에 불참하고 약속은 줄줄이 취소됐다. 집안에 갇힌 신세가 됐다. 발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발을 만져주고 따뜻한 물에 담그고 ‘안티푸라민’을 발라주었다. “미안해, 내 발아! 네가 나를 80년간 업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겨웠니”라고 다독거린다. 며칠 군화를 벗지 못한 채 훈련하고 행군하느라 발이 부어올랐다. 씻지 못해 발 냄새를 풍겼다. 무좀이 창궐해 발톱이 새까맣다. 그뿐인가. 발에 업혀 미국, 소련, 중국, 유럽 드넓은 세상을 헤집고 다녔다.    

“주인님, 저 억울해요. 그 넓은 세상을 다녔지만 양말과 신발 속에 갇혀 밖을 보지 못했으니, 감옥살이가 따로 없네요”라 푸념한다. “아이고! 불쌍한 내 발. 참 미안해”라며 어루만져준다.

옛날, 대야에 물을 담아 손님에게 드렸다. 땀내 나는 발을 씻고 편히 쉬면서 피곤을 풀라는 손님대접이었다. 또 아내가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의 발을 씻겨주었다.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표시였다. 세상 물정이 많이 바뀌어  그런 미풍양속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2,000년 전,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둘렀다.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베드로 차례가 됐다. 황감해서 “제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라 사양했다. 예수님이 “내가 네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런 몫도 나눌 수 없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한 술 더 떠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응석을 부렸다. 제자의 발을 씻겨준 스승이 세상에 또 있을까. 
발은 먼지와 땀으로 더럽혀진 신체의 밑바닥이다. 예수님은 밑바닥으로 내려가 사랑을 실천했다. 위대하다.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등 세상에서 버림받은 밑바닥 인간들을 섬기며 사랑을 완성했다.

예수님의 세족식보다 앞서 발을 씻겨준 여자가 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다. 한 여자가 지고지순하게 한 남자를 사랑했다. 여자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으니,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이렇게 적나라한 행동으로 사랑한 사건이 세상에 또 있을까. 

두 사건은 극명하게 다르다. 하지만, 마리아의 한 남자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예수님의 인류 보편적인 사랑으로 승화되지 않았을까? 세족식은 지금까지 전래되어 온다. 예수님의 대리자인 사제가 내 발도 씻겨주었다. 불쌍한 내 발을 어루만지며 세족식의 의미를 반추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