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35호 2022년 10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학교서 쪽잠 자며 밤샘 작업…5.7미터짜리 책도 냈죠”

이수지 그림책 작가

“학교서 쪽잠 자며 밤샘 작업…5.7미터짜리 책도 냈죠”


이수지 (서양화92-96)
그림책 작가



안데르센 상 받은 세계적 작가
책의 물성 이야기 일부로 녹여


“20대 초반 학부 재학시절은 힘들기도, 즐겁기도 한 시기여서 모교에 다닐 때를 생각하면 항상 흐뭇해져요. 갑자기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올라 작품을 한다기보단 그때부터 갖고 있던 생각들이 점점 가지를 치면서 커나가는 것이기에 제 창작 활동의 뿌리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시절이라고 할 수 있죠.”

최근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가 9월 21일 모교 미대 여성동문회 ‘한울회’가 주최하는 세미나의 연사로 섰다. 안데르센상은 2년에 한 번, 특정 작품이 아니라 아동문학에 중요하고 지속적인 기여를 한 작가 본인에게 수여한다. 이수지 동문을 강연 직전 인터뷰했다.

“모교 재학 시절 저는 학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강의동에서 쪽잠을 자며 야간작업을 할 때가 많았고, 그러다 지치면 학생회관 가서 좀 쉬다 오고 그랬죠. 서양화과로 입학했지만, 기술적 측면에서 다양한 예술의 가능성을 탐색하던 중 윤동천(회화81-85) 교수님 연구실에서 우연히 ‘아티스트 북’이란 장르의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미술 화집도 아니고 그림책도 아닌, 책 자체의 속성을 예술적 매체로 삼는 새로운 장르에 눈뜨게 됐죠.”

이 동문의 그림책은 책의 물성을 독특하게 비틀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경계 그림책 3부작으로 꼽히는 ‘거울 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는 책의 제본선을 각각 거울 안과 밖, 바다와 육지, 사물과 그림자 사이의 경계로 활용해 현실과 환상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책의 물성을 이야기의 일부로 만드는 셈이다.

“그림을 언어로 삼는 동시에 책이란 매체에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오래된 매체인 만큼 가장 관습적이고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그런 지점을 비틀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하죠.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그 안에 담긴 콘텐츠를 소화하는 게 아닙니다. 때문에 아이들이 일찍부터 영상 매체, 디지털 매체에 익숙해지는 요즘에도 고유의 호소력을 잃지 않을 거예요. 책의 무게를 느끼고 책장을 넘기면서 자기 페이스대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한테도 어떤 감흥을 준다고 생각해요. 책의 한계를 실험하는 작업을 앞으로도 계속할 겁니다.”

‘그림+책 작가 이수지입니다’라는 주제의 이날 강연은 영국 유학 시절 현지에서 발간한 첫 책 ‘Alice in Wonderland’부터 올봄 공개된 가수 루시드폴(본명 조윤석 응용화학93-99)의 10집 앨범 아트까지 이 동문의 20년 작품세계를 폭넓게 아울렀다. 20년 터울의 첫 책과 최근 앨범 아트 사이엔 무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단을 조금 높였을 뿐인데 현실과 허구가 구분되는 무대의 오묘함에 주목한 것. 이처럼 허술한 구획은 한편으론 두 세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 현실과 환상이 뒤엉키는 원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도 상통한다.

“루시드폴 10집 앨범은 루시드폴 특유의 서정적인 노래와 문명 비판적인 노래가 섞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곡들을 두루 들으면서 서로 다른 노래의 여러 면모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 방법으로써 무대를 활용했고요. 작은 종이 무대 위에서 종이 알바트로스가 날고, 자연을 움직이는 거대한 손이 등장하게 했지요. 인간 문명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연을 작은 허구의 공간을 만들어 담아보려는 의도였습니다.”
루시드폴과의 협업은 2020년 출간된 그림책 ‘물이 되는 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 루시드폴의 노래를 좋아하던 이 동문이 그의 노래를 그림책으로 만들어보겠느냐는 출판사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고. 그러나 막상 가사를 받아 들었을 땐 인물도 갈등도 사건도 없이 아름다운 시어들만 이어져 작업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항상 그림책의 처음은 어렵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물이 되는 꿈’에서 계속 반복해서 등장하는 ‘물’의 특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물은 계속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모든 것을 연결하며, 담기는 그릇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계속 변하잖아요. 그런 물의 속성을 잘 드러내려면 일반적인 책의 형식이 아닌 아코디언 폴드 제본 방식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제작비가 많이 드는 형식이었지만, 출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가제본한 샘플책을 정성 들여 만들었죠.”



ⓒ이수지, 루시드폴 물이 되는 꿈


그렇게 5.7미터 길이의 책이 발간됐다. 이 동문은 ‘물속에서 가장 편안하고 자유로운 이들이 누굴까?’ 스스로 질문했고 수중재활센터를 찾아가 답을 구했다. 몸이 불편해 보조 장비를 차고도, 물에 들어가면 꽃처럼 피어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포착한 것. 물속에서 자유로워진 아이는 흐르는 물결을 따라 점점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고, 노래의 절정에서 아이는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보조 장비 없이도 편안한 표정의 아이 얼굴에서 노래와 그림은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모티브로 한 ‘여름이 온다’를 제작했고 올해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좋은 그림책에선 ‘이 작가는 정말 신나게 작업을 했구나’ 하는 게 느껴져요. 스스로 정말 재밌고 독자에게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담기지 않으면 감동을 전할 수 없죠. 좋은 그림책이 막연하게나마 작가의 길을 안내해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게 즐거운 작업이 네게도 즐거운 무언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비록 사소해 보이더라도 내 이야기가 또 어떤 점에선 독자에게 닿게 되는 것 같아요.”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