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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호 2022년 3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새 정부 인사, 진영 아닌 국가 전체 인재풀에서 발탁하길”

김황식 호암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


“새 정부 인사, 진영 아닌 국가 전체 인재풀에서 발탁하길”
김황식 (법학67-71) 호암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



책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로 시대의 화두 던져
“독일 이야기지만 한국의 미래와 방향 담아”

거지도 손님이라 안 부르면 혼낸 어머니가 스승님
“북한 위협 무릅쓴 애기봉 크리스마스 점등 기억 나”


김황식 동문의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별명이 있다. 총리 시절(2010~2013) 붙여진 ‘이슬비 총리’라는 별명이다. 퍼붓는 장대비처럼 주위를 확 쓸어버리는 게 아니라 조용하면서도 촉촉이 땅속에 스며들어 싹을 틔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해주는 존재라는 뜻이다. 요란함, 시끌벅적함이 아닌 따스함으로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마주하는 스타일이다.

세상을 진보시키는 것은 거친 싸움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연평도 포격 1주기 추모식 때 우산도 거부한 채 비를 직접 맞으며 현장을 지켰던 것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2011년 그때 그 사진을 기억하는 것은 가식 없는 순수함과 진정성의 힘일 것이다. 그 마음 그대로 담아 김황식 동문이 이번에 책을 발간했다.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 독일 이야기지만 실제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대한민국의 미래와 방향에 관한 것이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경험한 것만큼 느낀다는 말이 있는데 판사, 감사원장, 국무총리의 공직을 두루 경험했기에 시대의 화두로 던진 메시지는 더 절박하고 절실하게 다가왔다. 새 대통령, 새 정부, 새 시대를 향해 던진 화두를 중심으로 김황식 동문을 만났다. (인터뷰는 대선 전인 3월 2일 이뤄진 것으로 새 대통령이 선출되기 전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대담 : 방문신(경영82-89) SBS문화재단 사무처장


-공직에서 물러난 뒤 근황이 궁금합니다.
“자유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퇴임 후 독일에서 6개월 공부를 했고, 고향 광주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조직위원장으로 봉사했죠. 지금은 안중근의사숭모회와 호암재단·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고요.”

-호암재단과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맡게 된 동기는 어떻게 되세요.
“그동안 총리 출신들이 많이 숭모회 이사장을 맡아 왔어요. 그래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맡았는데 공부가 많이 되고 있습니다. 호암재단은 호암 이병철 선생의 사회공익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재단입니다. 삼성호암상 운영이 가장 중요한 사업입니다. 재단 이사님들의 부탁으로 이사장을 맡게 되었고, 삼성문화재단도 이사장이 궐위되어 같은 경위로 이사장을 겸하고 있습니다.”

-최근 출간하신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이 화제입니다.
“1978년 초임 판사 시절 독일 대사관에서 법조인 초청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때 선발돼 독일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감사원장과 총리를 하면서 국정 운영에 관여하다 보니, 우리나라가 어느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의 롤모델로 독일이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단국가에서 통일을 이뤘고, 사회, 복지 시스템이 그 어느 나라보다 잘 갖춰져 있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정치 시스템과 총리의 리더십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겠다 싶어 책을 쓰게 됐죠.”

-결국 ‘독일에서 배우자, 정치에서 배우자’는 느낌이 듭니다. 독일 정치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국가 발전의 동력은 국민통합, 사회통합입니다. 우리 사회는 대립과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정치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하는데, 오히려 문제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죠. 독일에서는 대화와 협치로 그런 문제들을 극복하는 정치 시스템과 합리적인 정치 리더십이 존재합니다. 그걸 배웠으면 좋겠어요. 사회 통합만 이룬다면 우리는 훨씬 더 발전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이 가거나 울림이 컸던 인물을 꼽는다면?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낸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동방 정책을 통해 평화의 길을 만든 빌리 브란트 총리가 널리 알려진 분이죠. 저는 5대 총리를 지낸 헬무트 슈미트가 인상 깊습니다. 사회민주당 출신의 좌파 총리죠. 이성적이고 말도 논리적인 분입니다.
1970년대 말 소련에서 동독 등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했어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가 서유럽에서 크게 이슈가 됐죠. 평화주의를 내세우는 사민당 당원들이 ‘설마 그 핵무기 쓰겠냐, 그냥 놔둬라’라고 할 때 이분은 ‘아니다, 저쪽이 핵을 준비하면 우리도 핵을 갖고 무기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참된 평화가 유지된다’고 주장했어요. 당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 배치 결정을 합니다. 무기의 균형을 맞춰놓고 나서 협상을 통해 감축 내지 폐기시키는 협상을 하자 한 거죠. 이게 이중 결정입니다. 결국 불신임당해 총리에서 쫓겨나요. 이후 ‘디차이트(Die Zeit)’라는 주간지 공동 편집장을 맡아 20년 이상 독일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합니다. 이분의 의견이 독일 사회에서는 하나의 지침이 될 정도였어요. 이분이 애연가인데, 담배 피우면서 방송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세요. 존경받고 있다는 의미죠. 좌파지만, 그런 색깔을 전혀 안 내면서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 리더십을 보면서 큰 감동을 느낍니다.”

-한국에서 정치인이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는 뭐라고 보세요.
“우린 정치적인 이해관계, 나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생각에 너무 경도돼 있어요. 좌파, 우파로 나뉘어 서로 타협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해요. 독일은, 슈미트뿐 아니라 모든 총리들이 선택의 어려운 순간들이 다 있었는데, 본인들이 희생되더라도 큰 틀에서, 국익의 관점에서 결정을 내렸어요.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슈뢰더의 하르츠 개혁도 본인의 정치생명에 위험한 정책이었어요.
독일 정치에서도 왜 편가르기가 없겠어요. 당이 다른데. 하지만 비합리적인 편가르기는 자제했죠. 그러니까 퇴임 후에도 독일 모두의 지도자로 존경을 받는 거고요.”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 큰 공직을 맡으셨는데 안 알려진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2012년 김포 애기봉에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을 하려고 했는데 북한에서 점등을 하면 파괴하겠다고 협박을 했어요. 이명박 대통령과 김관진 국방장관이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을 때 제가 자리를 함께 하게 됐는데, 대통령께서 제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국방장관에게 북한이 실제로 도발할 것인지, 그 경우에 대한 대비책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장관은 미국과 협의하여 대비책을 마련했고, 그런 사정을 북한이 알도록 하였으니 실제로 도발을 못 할 것이라는 답변을 했죠. 곧 애기봉에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을 하도록 했어요.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긴장된 순간이 흘렀습니다. 도발은 없었습니다. 북한에 흔들리지 않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줬죠.”

-가장 힘들었던 순간 또는 내 의사결정이 잘못됐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으신가요.
“2012년 한일정보보호협정 체결 때, 그 진행 과정에서 야당이나 언론하고 소통이 충분히 안 돼, 밀실협약이란 평가를 받으며 곤욕을 치렀죠. 야당에서는 총리 해임 결의안도 제출하고 그랬죠. 사실 정보보호협정 내용을 파악해보면 신사협정이지 법적 구속력을 갖는 협정이 아니에요. 국익에 도움을 주면 줬지 피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거든요. 서로 주고 싶은 정보만 주는 것이라 큰 의미가 없는데, 한일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문제가 컸죠. 언론이나 야당을 상대로 좀더 열심히 소통하고 일을 처리했어야 하는데, 조금 안일했던 면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새 정부에 바라는 제1번을 꼽는다면.
“대립 갈등을 벗어나 통합과 협치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진영 논리, 이념에 의한 편가르기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실천 방안으로 인사를 할 때, 진영이 아닌 국가 전체적인 인재풀에서 발탁했으면 합니다.”

-되돌아볼 때 사법고시, 공직의 삶이 아니었다면 무엇을 하셨을까요?
“법조인이 안 됐더라면, 역사나 정치학 등 학문에 관심이 많았으니 학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어요. 하루하루 할 도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행운이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저는 과분하게 복을 받아서, 누구한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가 없어요. 항상 감사하자는 마음뿐입니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으셔서, 자녀 교육을 위해 그야말로 헌신을 하셨어요. 가정 형편에 부담이 되셨을 텐데, 7남매를 모두 고등교육을 받게 하셨어요. 바르게 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집에 찾아오는 거지도 손님이라고 안 부르면 혼내셨어요.”

-좌우명이나 좋아하는 문구 같은 게 있다면 소개 좀 해주세요.
“성경 로마서 12장에 나온 말씀을 좋아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정치인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후배들에게 한 말씀 전해주세요.
“요즘 젊은이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죠.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이런 말이 있는데 지금은 인생도 길고 예술도 길어요. 장수사회가 됐기 때문에 직업도 두세 번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모작, 삼모작 시대를 살아가야 하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여유 있게 좀 더 넓고 긴 시각에서 일생을 준비했으면 합니다. 일과 관계없더라도 어학, 인문 교양 공부나 나만의 취미생활을 만들어나가면, 이런 것들이 전부 어느 날 결합돼 인생에 도움이 되는 시절이 옵니다.” 정리=김남주 기자




손지열·황우여와는 독일서 한 아파트 생활

김황식 동문은 초임 판사 시절인 78년 독일 연수를 갔다. 주한 독일대사가 연수 희망자들을 직접 면접했다고 한다. 비슷한 연배의 손지열 판사(전 대법관), 황우여 판사 (전 새누리당 대표)가 같이 선발됐다. 3명 모두 독일에 함께 가서 한 아파트에서 같이 생활했다고 한다. 형제 이상의 정이 들어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78년 면접관이었던 독일 대사의 사람 보는 눈이 탁월했던 것 같다는 농담도 덧붙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발한 3명 중 한 명은 총리, 한 명은 대법관, 한 명은 당 대표를 했으니 말이다.

김 동문은 67학번이다. 강재섭(전 한나라당 대표), 김진표(전 민주당 원내대표), 현재현(전 동양그룹 회장), 이영애(전 춘천지방법원장·전 국회의원) 동문이 친하게 지냈던 법대 동기들이다.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은 별로 없고 농구, 배구하며 술마시고 당구쳤던 기억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당구치는 김황식? 그 모습이 연상이 잘 안 돼서 “당구 얼마나 치시는데요?”라고 했더니 “120. 즐길 수 있는 정도는 됐어요”라고 말했다. 3년 후배 중 이낙연(전 총리·전 민주당 대표) 동문은 고교 후배이기도 해 신입생 환영회 때 강제로 술을 먹여 뻗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김 동문은 7남매 중 막내이다. 교육에 관한 어머니 헌신 덕분에 당시 전남 장성에서는 보기 드물게 7남매가 모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 중 작고한 큰형은 모교 약대, 둘째 형은 모교 축산과, 셋째 누나는 모교 농가정학과를 졸업했다, 김황식 동문을 포함하면 7남매 중 4명이 서울대 동문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