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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2020년 4월] 뉴스 기획

서울대와 4·19혁명 60돌: 그날, 동문들은 자유의 씨를 뿌렸다

수유리에 잠든 박동훈·김치호·손중근·유재식·고순자·안승준


그날, 동문들은 자유의 씨를 뿌렸다



4·19 혁명 당시 희생된 모교 재학생들을 기리기 위해 관악캠퍼스에 조성한 추모공원. 관악 이전 후 공대 폭포 부근에 있던 기념탑 등을 지난 2002년 정문 가까이 옮겼다.




모교 관악캠퍼스에는 ‘민주화의 길’이 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바친 서울대생들을 추모하기 위한 길이다. 기나긴 세월,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서울대인의 여정을 상징하는 이 길의 시작점, 바로 4·19 혁명 기념탑이다.

4·19혁명이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동숭동 캠퍼스의 지리적 근접성, 3,000여 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참여해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낸 만큼 서울대의 역사에서 4·19의 의미와 여파는 남다르다. 4·19를 시작으로 훗날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학생 운동이 본격화됐다. 대학 문화 전반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 이후 학생 사회의 분노는 들끓었다. 모교도 문리대를 중심으로 대규모 학생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4월 18일 고려대생들이 시위 중 폭행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정치학과 3학년 학생들은 19일 아침으로 시위 일시를 결의했다.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는 구절로 잘 알려진 4·19선언문도 미리 준비했다. 이영일(정치58-64) 전 국회의원, 윤 식(정치58-64) 전 국회의원, 고 이수정(정치58-64) 전 문화관광부 장관 등이 이 과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월 19일 아침 부정선거 규탄을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온 각지 학생들의 물결이 혜화동에 다다르자 모교 학생들도 주저없이 합류했다. 문리대 광장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한 후 문리대를 필두로 법대와 미대, 수의대, 치대, 사범대, 상대 학생들이 ‘이놈 저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을 나섰다. 강의를 거부하고 집결한 의대 1, 2학년 생 200여 명도 흰 가운을 입고 몰려나온 약대생들과 합세했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의대 고학년생은 이후 거리에서 구호 활동을 펼쳤다.

대학신문에 기록된 당시 상황은 이렇다. “급기야 어느 학생인가가 이양하 문리대 학장의 소매를 끌고 ‘곧 출발할 테니 안심하시고 한 말씀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당국자의 입장으로 그날의 데모를 공개적으로 허용할 수 없었던 이 학장은 딱 한 마디 ‘여러분의 책임이 중대합니다….’ 두 손을 앞으로 맞잡고 제자들의 얼굴을 지켜보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성급한 학생의 데모대열은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1960년 4월 19일 아침 시위에 가담하려 교문을 나서는 모교 학생들의 모습.



수유리에 잠든 박동훈·김치호·손중근·유재식·고순자·안승준

4·19 희생 재학생 6명 안장
학생·교수 자치 활성화 계기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바리케이트를 뚫고 종로로 진출한 모교 학생들은 동국대와 성균관대, 동성고 학생 등 1만여 명과 함께 경무대 앞으로 나아갔다. 경무대 앞과 시내 곳곳에서 무차별 사격을 받고 쓰러진 사람들 속에 모교 학생들이 있었다. 19세 박동훈(법학 2학년) 동문과 갓 21세이던 김치호(수학 3학년) 동문, 손중근(국어교육 4학년)·유재식(체육교육 2학년)·고순자(응용미술 3학년)·안승준(경제 3학년) 동문 등 6명이 이날 총격으로 숨졌다. 병원으로 옮겨진 김치호 동문은 위중한 상황에도 자신보다 어린 학생에게 치료 순서를 양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4·19 전체 희생자 중 대학생은 총 22명. 모교 재학생 희생자 6명은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에 안장됐다. 김치호 동문의 형 김치선(행정47-51) 전 모교 법대 학장과 안승준 동문의 형 안승환씨는 동생을 기리며 모교에 장학금을 출연하기도 했다.





며칠 후엔 교수들의 시위가 모교를 거점으로 시작됐다. 4월 25일 연건동 의대 교수회관에 전국 대학 교수 258명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교수들의 모습은 큰 반향을 얻었다. 다음날 학생과 시민들이 다시 결집해 10만명 규모의 시위를 벌임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을 이끌어냈다.

민주주의 역사의 전환점이었던 4·19혁명은 이후 대학의 풍경도 크게 바꿔놓았다. 4·19를 기점으로 대학의 자율성이 확대되고, 교수와 학생의 자치 활동이 활발해졌다. 기존에 정부가 가졌던 서울대 부속기관장의 임명권은 총장에 위임됐고, 교수의 자치조직인 교수협의회가 꾸려졌다. 학생회의 역할을 대신했던 학도호국단은 해체되고 총학생회와 각 단과대학별 학생회가 조직됐다.

대학 축제가 활성화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대학의 사회적 의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요즘 ‘농활’의 원조인 ‘농촌으로 가기 운동’과 의대, 치의대의 무의촌 진료 활동이 시작됐다. 대학생들은 신생활운동, 민족통일운동 등을 주도했다.

‘역사상 처음 아래로부터 성취해낸 정치적 변혁’을 경험한 이 세대 동문들은 이후 다방면에서 4·19정신을 이어갔다. 특히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당시 사회학과 3학년으로 시위를 주도한 윤 식 전 국회의원을 비롯해 고 이수정 전 문화부장관, 이영일·박 실(정치58-63)·양성철(정치58-64) 전 국회의원, 이우재(수의학57-62) 전 한나라당 부총재,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한광옥(영문60입)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대표적인 정치권 4·19세대다. 1학년 때 시위에 참가한 이경재(사회60-64) 동문은 4선 의원을 지내고 4·19혁명 50주년 기념사업회장을 역임했다. 386세대 이전 정치권의 젊은 주역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들은 이후 각기 다른 정치적 행보를 걸었다.

문단에서는 4·19를 겪은 모교 출신 문인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소설에선 박태순(영문60-64)·김승옥(불문60-65)·이청준(독문60-66) 동문, 평론에서는 염무웅(독문64졸)·김 현(불문60-64) 동문 등이 4·19 문인으로 꼽힌다. 시인 김지하(미학59-66)·김광규(독문60-64) 동문은 각각 4·19 시의 대표작 ‘타는 목마름으로’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남겼다. “4·19때는 자기 가능성과 희망, 꿈이 거의 무한대로 확산되는 느낌이었다”는 이청준 동문의 말처럼 이 세대 작가들은 4·19 당시 느낀 희망과 자부심, 이후 정치적 격변과 산업화의 소용돌이에서 맞닥뜨린 좌절까지 문학으로 승화하며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모교 동문은 4·19 정신을 알리고 계승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4·19혁명 주역 모임 ‘4월회’는 안동일(법학59-63) 변호사를 초대 회장으로 출범해 현재 김용균(법학60-64) 변호사가 회장이다. 올해 60주년 기념사업은 외대 재학 당시 4·19에 참여한 김기병(행대원65-67 본회 명예부회장) 롯데관광개발 회장이 이끌고 있다.<김기병 동문 인터뷰 하단 링크 참고>



관악캠퍼스 정문에서 대운동장을 왼쪽에 두고 올라오다 보면 두레문예관 맞은편 4.19 추모공원을 찾을 수 있다.






소설가 김만옥(국문59-63) 동문은 소설 ‘계단과 날개’에서 서울대생이 겪은 그날의 풍경을 생생히 묘사하고 “소설에 옛 동숭동의 지리적 존재도 담아두는 것이 내게 부여된 중요한 임무”라며 “그곳이 이 땅의 학문의 본고장이며 4·19의 진원지로서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늘날 캠퍼스에선 관악캠퍼스 두레문예관 앞에 조성된 ‘4·19 추모공원’에서 4·19혁명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문리대와 사범대 등 옛 단대 캠퍼스에 흩어졌던 기념탑과 추모비를 한데 모았다.

한때 다소 외진 공대 인근에 위치했으나 2002년 정문 가까이로 이전해 접근성이 높아졌다. 성낙인 전 총장과 오세정 총장이 취임 후 첫 공식 일정으로 이곳을 찾았다. 1961년 문리대생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4·19기념탑은 이정갑(조소55-60) 동문이 설계했다. 시설 하나하나 정의로운 학우를 떠나보낸 친구들의 그리움이 녹아 있다. 매년 4월 19일 학생 대표와 교수들이 추모공원에서 기념식을 연다.


박수진 기자



내가 겪은 4.19 


따스한 봄기운과 새학기의 설렘도 잠시, 아직 오지 않은 민주주의의 봄을 위해 도서관과 강의실을 박차고 결연히 거리로 나섰다. 어느덧 팔순을 전후하는 나이지만 ‘4.19세대’의 기억 속엔 그날이 늘 생생하다. 미주동창회보 2020년 4월호에 미주 동문이 게재한 글을 일부 발췌해 싣는다. 




이정근

국어교육60-64

전 LA 유니온교회 목사



“죽음의 문턱에서도 무서울 것 없었다”


4월이 오면 한국의 꽃들은 선혈을 토한다. 학생들의 눈은 유난스레 영롱해지고 그들의 입은 비장을 머금으며 그들의 가슴은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들은 시민을 향하여 그리고 임금들을 향하여, 아니 어쩌면 하늘을 향하여 목에 핏줄이 서도록 트럼펫을 불어댄다. 그것은 참혹한 시신이 되어버린 정의와 자유를 부활시키려는 4·19의 몸부림이요 함성이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서울대 학생회 4·19 선언문).


1960년 4월 19일, 만원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나의 귀에 고대 시위대가 정치깡패들에게 잔학스럽게 짓밟혔다는 뉴스가 확성기처럼 왕왕 울려왔다. ‘에이, 못된 놈들.’ 그런 말이 내 입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다. 학교에 도착하여 첫 시간 강의를 듣는 중이었다. 밖에서 무슨 함성이 들려왔다. 우리는 사전약속이라도 한 듯이 책가방을 교실에 남긴 채 우르르 몰려나가 정문 앞으로 대열을 지었다. 모두 이심전심이었다.


돌진하는 도상에는 곤봉세례도 기다렸고, 눈물가스도 매복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만은 그런 것이 별로 위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신입생인 우리들이 대오에 앞장섰는데도 아무 무서운 것이 없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오직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하게 죽은 김주열 고교생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바로 내 얼굴처럼 생각되었다.


우리는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며 청량리에서 종로를 거쳐 국회의사당으로 돌진했다. 벌써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다시 중앙청을 돌아 이승만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했다. 그런데 경복궁 담을 끼고 효자동으로 들어서면서 저 멀리 경무대 경호원들이 집총자세로 서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데모대가 그때 국민대학 건물을 지나 더 전진하게 되자 그 경호원들은 총을 어깨에 밀착시키고 하늘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공포탄의 위협이었다. “저놈들 봐라. 하나님부터 쏘아죽인 뒤에 우리를 죽이려는 것 아냐.” 나는 옆 친구들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총부리는 이윽고 우리를 향하여 불을 뿜었다. 고막을 찢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는 즉각 경복궁 담벼락으로 뛰어가서 납작 몸을 붙였다. 한참을 콩 볶듯 하는 소리가 나더니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는 학생들과 꼼짝 않거나 도로에서 뒹구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때에 우리 사범대 학생 가운데 두 명이 살해되었다. 손중근 선배(국어과)와 유재식 선배(체육과)였다. 나는 부상당하지도 않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4·19혁명을 겪은 뒤부터는 처절한 죽음을 또 한 번 체험했었다고 자주 되새긴다. 하지만 우리 모국인 한국을 살려내기 위하여 목숨을 던졌다고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