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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호 2019년 10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VERITAS’는 용기를 바탕으로 한 진리

박승준 최종현 학술원 자문위원



박승준
중문74-78
최종현 학술원 자문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 홍콩 특파원


대학 2학년 때인가 기억된다. 학보 ‘대학신문’에 당시 소설가로, 불문과 선배(60-65)이셨던 김승옥 작가의 편지랄까, 수필이랄까 그런 글이 실렸다. “재학생 후배들이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왼쪽 가슴을 조금 앞으로 내밀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김승옥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글 속에서 한 당부는 이런 것이었다. ‘그런 후배들의 모습이 딱해 보인다…왼쪽 가슴에 단 은빛 학교 배지를 자랑삼아 보여주려고 왼쪽 가슴을 조금 앞으로 내민 자세로 걸어 다니는 모습인데, 후배들의 그런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나도 입학한 직후부터 한동안 그런 자세로 걸어 다닌 것 같아, 김승옥 선배의 글을 읽다가 갑자기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기억이 떠오른다. 은도금을 한 배지에는 월계수 나뭇가지로 둘러싸인 책표지에 ‘VERITAS LUX MEA’이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어 나는 더욱 자랑스러워 했고, 다른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날 때 “이게 무슨 말인지 아니?”라고 물어보고는 우쭐대며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이야”라고 말해주면서 의기양양해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김승옥 선배의 글을 읽은 다음부터는 학교 배지를 왼쪽 가슴에 달고 다니지 않았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외출복으로도 입고, 그대로 입고 잠들기도 하던 감청색 교복 상의도 다시는 입고 다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른바 ‘긴조(긴급조치) 시대’였던 당시 휴교령과 휴업령의 연속이었던 세상이었는데 ‘진리’라는 단어가 새겨진 학교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닌다는 것이 호사스런 일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집으로 배달된 총동창신문 9월호 498호 6면에는 ‘최기영 동문 등 6명 장관 임명’이라는 동문 소식이 실려있었고, 그 속에는 조 국 법무부 장관(공법82-86)의 임명 소식이 포함돼 있었다. 8월호에서 윤석열 동문(법학79-83)이 검찰총장에 임명됐다는 동정을 본 기억이 떠오르면서 두 동문 사이에 벌어질 기구한 운명을 예상해보기도 했다. 조 국과 윤석열 두 동문이 맞게 될 기구한 운명의 이야기는 물론 우리 동문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 나라의 역대 정권과 역대 정부의 운영을 책임져온 장관들뿐 아니라, 우리 정치에서 각종 주역을 맡아 정치갈등의 드라마를 연출해온 많은 주역들이 우리 동문들이었다.


물론 모교의 우리 정부와 정치에 대한 그런 기여가 미 하버드대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하버드대는 현재까지 졸업생과 교수를 포함해서 한 대학 출신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15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또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존 F.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미국 대학들 가운데 가장 많은 7명의 대통령, 36명의 퓰리처상 수상자, 21명의 연방 대법원 대법관과 7명의 세계은행 총재를 배출하는 기여를 했다,


다만 모교의 배지와 하버드대 배지에 적힌 ‘VERITAS(진리)’라는 말이 성경 요한복음 18장 37절에서 예수가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은 빌라도에게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점을 후배 동문과 재학생 후배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모교의 배지에 적힌 ‘진리’라는 단어는 정적(靜的)인 개념의 진리가 아니라, 권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내가 온 것은 옳은 말을 하기 위해서”라는 적극적인 개념에서 비롯된 용어라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모교 배지에 내걸린 VERITAS는 학문의 진리뿐만 아니라, 권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을 후배 동문과 재학생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