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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2018년 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통일되면 평양 산정현교회 재건하고 싶다”

김상복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 이산가족 아픔 딛고 세계적 종교지도자로
13면 동문을 찾아서

“통일되면 평양 산정현교회 재건하고 싶다”

김상복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





연간 240만부 찍는 ‘오늘의 양식’ 발행인
이산가족 아픔 딛고 세계적 종교지도자로
총동창회에 장학금 7,000만원 기부하기도


새해 벽두,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자 김상복(종교57-63)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를 찾았다. 김 동문은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원로 중 한 명이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그가 1980년부터 발행하고 있는 ‘오늘의 양식’(한영본) 이란 소책자로 영어 공부한 동문이 꽤 될 것 같다. 최근 동창회에 7,000만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한 그를 서울 양재동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만났다. 김 동문은 이 학교 초대 및 4대 총장을 지냈다.


-어떻게 지내세요.
“일주일에 이틀은 여기 나와 강의도 하고 글을 씁니다. 지난해까지 CTS기독교방송 ‘7000 미라클’이라는 프로그램을 신은경 아나운서와 진행했지요. 교회와 학교서 은퇴는 했지만 불러주는 곳이 있어 강의도 하고 집회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목회자신데 큰 돈을 기부하셨어요.
“요즘 과거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 많아요. 어려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고 장학금을 받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빚을 갚는 마음이었지요.”

-중고등학교 시절 고아처럼 어렵게 공부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부모님이 부산 분들인데 1934년 아들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갔어요. 큰아버지가 평양에서 사업을 크게 하셨지요. 전쟁이 나자 부모님과 동생 넷은 평양에 남고 저와 형님 두 분, 누이는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때부터 이산가족으로 살아왔어요. 부산중학교 시절에는 이모댁에서 살다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부터 홀로 지냈습니다. 입주가정교사와 친구 집을 전전하며 고등학교 3년을 보냈어요. 외롭고 가난하고…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지요. 반면 가장 단단하게 훈련받은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후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다 이길 수 있었지요. 그 때만 한 어려움은 없었으니까요.”

김 동문은 “경복고를 졸업한 지 60년 되던 해에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받았는데 그날 참 많은 생각들이 났다”고 덧붙였다.

“교정에 외로울 때면 기대던 고목나무가 있어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더군요. 친구들의 부모님을 뵐 때마다 ‘나는 왜 부모가 없나’, 참 외로웠지요. 동문상을 받은 날은 아내가 옆에 있었어요. 사진을 찍었지요. 참 감사하더라고요. 어릴 때 기도를 다 들어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 너무 놀라운 기적들이 내 삶 속에 펼쳐졌으니까요.”

김 동문은 대학시절 통역을 하다 만난 미국의 허대전(J.Gordon Holdcroft) 목사의 도움으로 196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페이스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 신학석사, 그레이스 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를 받았다. 이후 워싱턴신학대학 등에서 19년간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미국인교회에서 9년간 목회를 했다. 교포 교회인 벧엘장로교회를 개척해 11년간 성공적인 목회를 이뤄갔다.

-어릴 때부터 목사의 꿈을 꾸셨나요.
“친조부, 외조부가 모두 기독인이셨고, 어린 시절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적 신앙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목사를 꿈꾸지는 않았어요. 기독교 철학을 공부해 교수가 되고 싶었는데, 제 의지와 무관하게 두 가지 일을 다 하게 됐어요. 지금은 교수보다 목사로 불러주는 게 더 좋습니다.
미국서 석사 2년 때 한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내 목적이 아닌 절대자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전까지는 내 뜻이 중요했지, 하나님의 생각은 관심이 없었지요.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낸 목적이 무엇일까. 이후 내가 원치 않는 길로 이끌 때마다 그 목적을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어떤 동기로 오게 됐는지.
“그것도 제 의지와는 무관했어요. 사실 미국서 교포 청소년 사역을 신나게 하고 있을 때라 한국으로 갈 생각은 전혀 안했죠. 그런데 한국의 할렐루야교회, 아세아연합신학대학, 횃불선교센터에서 집요하게 나를 불러요. 그때 에딘버러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인데 고민이 컸죠. 기도하는 중에 가라는 음성을 듣고 1990년 한국에 왔어요.”

28년의 한국 생활 동안 할렐루야교회를 등록교인 1만5,000명의 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고 아시아복음주의연맹 회장, 세계복음주의연맹 회장 등을 지내며 세계적인 교계 지도자로 큰 영향을 미쳤다. 모교 동문 목사회장, 기독동문회 회목으로도 봉사했다. 특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북한재건위원장, 남북교회협력 위원장 등을 맡아 통일선교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북에 계신 부모님은 만나셨나요.
“대학생 때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부모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홍콩을 경유해서 보내는 방법이 있었어요. 그 편지는 돌아왔어요. 미국에서 유학할 때도 두 번 보냈는데 한 편지가 중앙정보부로 들어가 요주의 인물이 됐습니다. 1980년 한국에 와야 하는데 이 일로 비자가 발급 안 돼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들어오긴 했지만 체류 동안 두 명의 감시조가 늘 저를 따라다녔어요.

어머니는 1986년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 돌아가셨지요. 1984년 미국에 있을 때인데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놀랐죠. 그때는 고민이 많았어요. 북에 갔다 와서 교포사회에서 따돌림 당하고 중앙정보부에 낙인찍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결국 미국의 친북그룹을 이루게 됩니다. 일본의 조총련처럼. 1983년부터 북에서 미국 사회에 있는 이산가족들에게 초청 편지가 많이 왔어요. 고민 끝에 1986년 북한에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미국 국적을 갖고 있어서 가능했죠. 당시 어머니 연세가 80세였어요. 이후 몇 번 더 왕래하다가 8년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형제들은요?
“여동생 세 명과 남동생 한 명이 평양에 살아요. 다들 좋은 대학을 나와 그 사회에서 프로페셔널로 살았던 것 같아요. 평양에 살았다는 거 자체가 열심히 살았다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렵지요. 이렇게 저렇게 도와줬습니다.”

-통일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시겠어요.
“지금도 가장 큰 관심사예요. 통일과 북한의 복음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북한재건위원장을 맡아 북한이 만약 독일처럼 갑자기 문이 열리면 빠른 시간 내에 북한 내 교회를 회복시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각 목회자들에게 지역을 맡겨 통일이 되면 가야 할 곳을 정해뒀지요. 그 계획들을 현재에 맞게 업데이트 해야 할 것 같아요. 만약에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다면 평양에 제가 다니던 산정현교회를 재건하고 싶어요. 형제들이 아직 거기에 있으니까.”

재학생 시절 그를 기억하는 동기 선후배들은 그의 ‘새생활운동 계몽대’ 활동을 첫 번째로 꼽는다. 함께 활동했던 서영호 동문은 “김상복 형이 청운각 고급 요정에 들어가 시위대 앞에서 유창하고도 멋진 영어 연설을 해 외국 기자들의 주목을 끌었고 타임지에도 소개됐다. 김 형은 우리의 리더였다”고 술회한다.

-학창시절 대단한 리더였던 것 같아요.
“그런 건 아니고요. 손봉호나 김명혁이 대단하다면 대단했죠. 4·19 혁명 뒤 사회가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정치세력만 바뀐다고 나라가 바뀌는 게 아니구나, 국민이 변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8가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문리대 출신 학생들이 운동을 펼쳐나갔죠. 그때 내건 구호가 재미있습니다. ‘푹 썩은 분들은 땐스홀 카바레 요정으로’. ‘휘발유 없는 나라 차, 전차 이용하자.’ ‘한국 사람이냐? 국산품 쓰자.’ ‘일본 음악 속에 니뽄도 들어있다.’ 등.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어요. 의대, 법대로 퍼져나갔죠. 학창시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입니다.”

-새해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주세요.
“새해에는 국민들의 마음 속에 평화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복잡하고, 분노, 실망, 걱정, 두려움이 너무 많아요. 위정자들은 국민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포용력을 갖고 내 그룹이 아니더라도 품고 가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으면 합니다.”


김남주 기자



미군 댄스홀 습격하고 미군 박수 받고…

손봉호 동문이 기억하는 김상복



서울대 새생활운동 대원 한 팀. 앞줄 모자를 쓰고 앉은 김상복, 바로 오른쪽 손봉호, 왼쪽 두 번째 서영호, 서영호 뒤 이형기 동문.


1960년 4·19혁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생활운동이란 것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에서 자주 만나 교제했던 김명혁, 김상복, 서영호, 이형기, 홍성현 등 기독학생들이 주동했다. 비록 기독학생들이 발기했지만 다른 학생들도 가담해서 수백 명이 나서게 되었다. 조직이 그렇게 치밀하진 않았지만 김상복 군이 총책임자였다.

그 때는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던 커피와 양담배가 전부 밀수품이었고 그 액수만도 대전시 인구가 일년을 먹을 식량값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이에 화가 난 학생들이 다방으로 돌아다니며 커피 잔을 엎지르고 양담배를 빼앗는 등 난동을 부렸다. 그러나 4·19 이후 영웅이 된 학생들이 하는 행동이고, 그 동기 자체는 옳은 것이라 사람들은 별로 항의하지 못했다.

커피, 양담배 외에 우리는 댄스도 추방하기로 했다. 그 때 마침 댄스 바람이 불어 댄스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바람난 남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명동 근방의 한 댄스홀을 습격해서는 2층은 내가, 3층은 김명혁 학생이 무대 위에 올라가서 마이크를 빼앗아 목이 쉬도록 고함을 친 기억이 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이 따위 퇴폐 춤을 추느냐고 화를 낸 것이다. 춤을 추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벽 쪽을 향해서 쭈그려 앉은 것을 본 기억이 난다.

하루는 효자동 근방에 있는 미군 댄스홀을 급습했다. 미군이 한국 여자들과 춤추는 것도 보기 싫었지만 고급 공무원들이 관용차를 타고 가서 춤을 추는 것에 화가 난 것이다. 수십 명이 몰려가서 일부는 바깥 주차장에 세워놓은 관용차의 번호를 적고 일부는 커다란 댄스홀에 난입했다. 춤을 추던 사람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김상복 학생이 무대 위에 올라가서 영어로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영어가 얼마나 유창하고 그 연설 내용이 얼마나 좋았는지 미군들이 크게 박수를 친 것이 기억난다. 김상복 학생은 종교학과에 다녔는데 영문과였던 나보다 월등하게 영어를 잘했다. 이제 우리 모두 늙어서 불의와 부조리로 가득한 사회와 교계 현실과 그저 타협하면서 살고 있으니 안타깝고, 패기와 정의감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김 동문은


193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모교 졸업 후 1965년 미국으로 유학, 미국에서 26년간 교수, 목회자, 선교동원자로 활동했다. 1990년 6월 귀국 아세아연한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주임교수, 횃불선교센터 실행위원장,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할렐루야 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했다.

2000년 조선일보 한국교회 25명 최고설교자, 2001년 월간중앙 한국교회 30인 인물, 2013년 자랑스러운 경복인상, 2014년 ‘자랑스러운 원로목사 대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목회자의 리더십’ 등 100여 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1980년 월간 ‘오늘의 양식’ 한영본을 미국에서 발행하기 시작해 현재 미국과 한국에 연간 240만부를 보급하고 있다. 가족으로 부인(이령자)과 사이에 세 딸과 여섯 외손자, 외손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