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호 2024년 10월] 기고 에세이
건망증
유광현 수필가
건망증

유광현 (법학69-77)
수필가
내 앞에서 계산을 하던 할머니가 사라졌다. 아파트단지 지하에 있는 슈퍼마켓 계산대에 계산을 끝낸 물건이 수북이 쌓여 있는데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 차례를 기다리던 내가 구입한 물건을 내밀자 두리번거리며 할머니를 찾던 계산원이 혼잣말을 했다. “어딜 가셨나” “깜빡하고 집에 가신 것 아닐까요?” 내가 농담 삼아 말하자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낯익은 중년의 계산원이 할머니가 마치 친정 엄마라도 되는 듯 정색을 했다.
내가 시장바구니를 들고 지하주차장을 나설 때 뛰어오는 할머니를 만났다. “집에 가다 생각이 났지 뭐예요.” 할머니는 내 시장바구니를 곁눈질하며 반가워했다. “며칠 전에는 십사만 원 짜리 새 신발을 ‘레때르’도 떼지 않은 채 재활용처리장에 두고 왔잖아요.” 안경이 잘 어울리는 곱상하게 늙은 내 또래의 할머니는 처음 본 나를 초등학교 동창이라도 되는 듯 수다를 떠느라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갈 생각을 안 했다.
며칠 후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는데 몇 발짝 앞에서 노인이 걸어갔다. 큰 키에 삐쩍 마른 백발의 노인이 장우산을 들고 휘적휘적 걸어간다. 집을 나올 때 내리던 안개비가 갑자기 소나기로 변했다. 우산을 급히 펴고 앞에 가는 노인을 보니 그는 우산을 쓸 생각을 안 한다. 궁금증이 들기 시작한다. 저 노인이 비가 오는 걸 모르고 있나? 아니면 우산을 갖고 있는 걸 모르고 있나? 난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 쫓아가서 우산을 쓰라고 얘기를 해야 하나? 한참을 말없이 노인을 따라가다 갈래 길에서 헤어졌다.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노인을 눈으로 좇다가 나는 그저 비가 그치길 바랐다.
겨울에 속옷 바람으로 택배를 찾으러 나왔다가 비번이 생각 안 나 아내가 귀가할 때까지 현관 앞에서 몇 시간을 떨고 있었다는 친구의 친구 얘기를 동창 모임에서 들었다. 예전에는 웃어넘긴 비슷한 이야기가 이젠 남의 일이 아닌 내 일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가끔 집을 나올 때 두려움을 느낀다. 현관 비밀번호를 잊어먹어 집엘 못 들어올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아내가 집에 없거나, 초인종을 눌러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게 얼마나 창피하고 번거로운 일인가.
이렇게 호들갑스럽고 오지랖 넓은 두려움과 연민의 정체는 무엇일까? 잠 안 오는 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까마득히 달아나서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는 젊은 날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슈퍼마켓과 공원에서 만난 할머니와 노인과는 다르다고 어린애같이 앙탈을 부리는 것이다. 건망증이 노화의 자연현상이란 과학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