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호 2024년 6월] 기고 에세이
조완규 전 모교 총장 '추억의 창'-과학기술 유공자가 되고
과학기술 유공자가 되고
조완규(생물48-52) 전 모교 총장·국제백신연구소 상임고문
지난해 10월 30일 국제백신연구소 나의 사무실 문에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패를 부착하는 명패헌정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에는 다른 유공자와 과학기술한림원 임원 등이 참석하였다. 2021년 이상민 의원이 발의한 ’과학기술유공자 예우에 대한 규정‘에 따른 행사였다. 1945년 해방 이후 황무지와 같았던, 그리고 1950년 터진 6·25전쟁이 3년을 지속하는 가운데 경제기반이 거의 바닥이었으나 대한민국이 10대 경제대국에 이를 만큼 성장한 것은 결정적으로 과학기술력의 기여라 할 수 있다. 2015년 12월, 정부는 해방 후 과학기술에 크게 기여한 학자 82명을 유공자로 선정하였다. 그 중 62명은 이미 타계하였고 나머지 생존자 20명이 ’과학기술유공자회‘를 구성하였고 내가 유공자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뒤에도 해마다 유공자를 선정함으로서 유공자 중 생존 유공자 수는 모두 24명이다.
1948년, 2년간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예과과정을 거친 나는 화학과를 희망하였으나 예과생 200명 가운데 90여 명이 문리과대학 화학과로 진입함으로써 나는 15명이 선택한 신설학과인 생물학과를 택하였다. 생물학과에 적을 두더라도 화학을 청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물학과에는 일본북해도제국대학 출신인 세포학 전공인 동물학 교수와 역시 일분 북해도제국대학출신인 식물생리학을 전공한 식물학교수의 두 분뿐이었다. 실습용 장비도 매우 빈약하여 학생용 현미경 3대와 정온기뿐이였다.
당시 세포학은 첨단 분야이며 나는 이에 흥미가 있어서 이를 전공분야로 택하였다. 각종 생물의 세포를 염색한 후 이를 현미경을 통해 염색체의 구조를 비교 관찰하는 지도교수의 일을 도왔다.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고 동급 학생들 대부분이 군 입대, 월북 혹은 행방불명 등으로 결국 1952년 나 혼자 생물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원 진학도 나 혼자였다. 생쥐 꼬리에서 채취한 혈액을 슬라이드에 얹어 커버글라스로 덮고 백혈구의 운동능과 수명을 관찰해 그 결과를 정리하여 1956년에 이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논문이다.
당시 세포학은 첨단 분야이며 나는 이에 흥미가 있어서 이를 전공분야로 택하였다. 각종 생물의 세포를 염색한 후 이를 현미경을 통해 염색체의 구조를 비교 관찰하는 지도교수의 일을 도왔다.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고 동급 학생들 대부분이 군 입대, 월북 혹은 행방불명 등으로 결국 1952년 나 혼자 생물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원 진학도 나 혼자였다. 생쥐 꼬리에서 채취한 혈액을 슬라이드에 얹어 커버글라스로 덮고 백혈구의 운동능과 수명을 관찰해 그 결과를 정리하여 1956년에 이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논문이다.
1957년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은 나는 학과의 연구용 기자재 불비 등 열약한 연구여건으로 인하여 연필과 종이로 할 수 있는 연구과제, 즉 한국인의 미각, 혀의 모양새, 색감이상자의 빈도 등 인류유전학 등을 택하여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그 중 두, 세편은 국제학술지에 실렸다. 그런 가운데 나는 연필과 종이로 할 수 있는 연구과제, 즉 우리나라 출생성비와 관련된 분야를 연구주제로 택하였다. 1930년 영국의 학자는 우리나라 남아 출생률이 여성 출생 100명에 118명으로 세계에서 가당 높다고 하였고, 한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의 일본인 교수는 100대 100으로 남아 출생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발표하였다. 나는 어느 쪽이 옳은지를 밝히고 싶었다. 의과대학 산부인과 자료를 수집하였고 서울, 강원 혹은 제주도 등 한반도 전 지역 주부를 면담하며 자녀의 출생상황을 집계하였다. 그 결과 여아 출산 100에 남아 출생 110의 결과를 얻었다. 또한 우리나라 부인의 출산력과 관련된 연구도 계속하였다. 1960년도 중반에 대일청구권과 IBRD 등의 재원으로 연구용 시설이 갖추어짐에 따라 나는 기자재를 이용한 연구과제로 바꾸었다. 최초의 실험실 연구과제는 한쪽 난소를 제거한 생쥐의 나머지 난소에 미치는 생식선자극호르몬의 보상작용에 관한 연구였다.
1964년 나는 미국 록펠러재단 소속 미국인구협회(Population Council) 생의학부 연구장학생으로 선발되어 2년 간 미국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였다. 연구소장인 ‘J. Biggers’ 교수는 생쥐 연골을 인공 배양액에서 배양하며 골화현상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학자였다. 나는 그가 개발한 배양액에 생후 2주인 생쥐 난소를 배양하며 배란을 유도하는 실험에 집중하였다. 배양 중인 난소는 3, 4일 후, 선명한 극체를 갖춘 난자를 배란하였다. 난소를 배양하는 실험은 이것이 최초이며 따라서 배양 중인 난소로부터 난자의 배란을 유도한 실험은 내가 처음이었다. 귀국할 때 록펠러재단으로부터 연구비 15,000 달러를 수령하였다. 그 연구비로 미국, 유럽 등 30여 군데 업체에 1000여 가지 연구용 기자재를 주문하여 완벽한 배양실험실을 갖추는 데 1년이 걸렸다. 나는 인공배양액을 구득할 만큼 연구비가 넉넉지 않아 대신 생쥐의 안전방(眼前房) 내 체액을 난자 배양액으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안전방 내 체액의 조성은 인공배양액보다 생체의 배양실험에 더 유익함을 알고 실험실 기자재가 갖추어지기까지 생쥐 여포난자 배양에 안전방을 이용한 실험을 지속하였다. 안전방에 이식된 생쥐의 미성숙난자는 어김없이 정상적인 성숙과정을 진행하였고 이미 자궁에 착상할 단계의 포배까지 분화하였다. 인공배양액을 구입할 재원도 없고 또 직접 배양액을 제조할 원재료도 구하기 어려운 때 안전방 내 체액을 난자 배양실험에 이용한 것은 매우 창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나는 1970년부터 2년간, 두 번째 외국 연구소 연구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WHO 지원을 받아 미국 볼티모아의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4개월, 보스턴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10개월, 그리고 귀국 전 8개월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소에서 보냈다. 특히 dbcAMP와 생쥐 난자의 성숙억제 관련 실험에 집중하였다. dbcAMP의 효능은 난자 핵막이 존재할 때 영향을 주고 핵막이 제거된 난자에게는 별 영향이 없음을 밝혔다. 일반적으로 난자 배양실험은 유리로 제조된 배양접시를 이용하였다. 직경 5cm, 높이 1cm의 유리배양접시 내에 파라핀 오일로 가득 채우고 그 바닥에 5mm 정도의 성분이 다른 서너 개의 배양액을 심고 그 속에 난자를 넣어 배양실험에 이용한다. 배양접시 안에 심어 넣은 난자 등을 37도 온도를 맞추고 5%의 CO2 탄산가스가 공급되는 정온기 내에서 배양한다. 난자의 성숙과정을 점검하기 위하여 수시로 배양접시를 정온기에서 끄집어내어 현미경 재물대까지 옮겨 관찰하지만 그때마다 파라핀 오일이 밖으로 흐르거나 혹은 오일 밑의 성분이 다른 배양액이 뜻하지 않게 합쳐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 배양접시를 옮기는데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세관을 이용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5cm로 자른 구경 1mm의 유리관 중앙에 1cm의 배양액을 넣고 그 안에 실험용 난자 혹은 수정난을 심고 양 끝을 2mm의 파라핀 오일로 막은 후 이 미세관을 정온기에 옮겨 난자의 분화과정을 관찰하는 소위 미세관 배양법, ‘Microtube Culture Method’를 개발하였다. 나는 이 미세관 안 배양액에 수정난, 2-세포기의 분화 중인 미성숙 난자를 넣고 이 미세관을 시험관내에 고정시키고 시험관의 이동 중 유리관이 37도로 유지되도록 여러 겹의 솜으로 싸아 내 몸에 묶은 후 걷고, 버스 타고 기차를 타며 케임브리지에서 이틀 뒤 에딘버러의 친구 연구실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보는 앞에서 시험관 내의 미세관을 풀어 미성숙 배아의 분화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틀 사이 내 몸에 묶인 미세관 내 어떤 난자들은 이미 포배로 분화하였고 혹은 분화 중이었다. 이 결과를 확인한 교수들은 경탄하였다. 이 방법은 한 때 미국내 발생생물학 교과서에 ’Cho’s Method’로 소개 되기도 하였다. 결국 미성숙 동물의 배아를 원거리로 이동하여 그곳의 암컷 자궁에 이식하여 착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대학 교수로 재직 중 미국, 영국 대학에서 4년간 연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큰 보람이었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세관을 이용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5cm로 자른 구경 1mm의 유리관 중앙에 1cm의 배양액을 넣고 그 안에 실험용 난자 혹은 수정난을 심고 양 끝을 2mm의 파라핀 오일로 막은 후 이 미세관을 정온기에 옮겨 난자의 분화과정을 관찰하는 소위 미세관 배양법, ‘Microtube Culture Method’를 개발하였다. 나는 이 미세관 안 배양액에 수정난, 2-세포기의 분화 중인 미성숙 난자를 넣고 이 미세관을 시험관내에 고정시키고 시험관의 이동 중 유리관이 37도로 유지되도록 여러 겹의 솜으로 싸아 내 몸에 묶은 후 걷고, 버스 타고 기차를 타며 케임브리지에서 이틀 뒤 에딘버러의 친구 연구실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보는 앞에서 시험관 내의 미세관을 풀어 미성숙 배아의 분화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틀 사이 내 몸에 묶인 미세관 내 어떤 난자들은 이미 포배로 분화하였고 혹은 분화 중이었다. 이 결과를 확인한 교수들은 경탄하였다. 이 방법은 한 때 미국내 발생생물학 교과서에 ’Cho’s Method’로 소개 되기도 하였다. 결국 미성숙 동물의 배아를 원거리로 이동하여 그곳의 암컷 자궁에 이식하여 착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대학 교수로 재직 중 미국, 영국 대학에서 4년간 연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큰 보람이었다.
1968년 학생들의 반정부 및 민주화 쟁취를 위한 소요가 극심할 때 나는 문리과대학 학생과장으로 임명되었다. 2년간 학생과장 근무로 피곤하여도 근무가 끝나는 대로 연구실로 복귀하여 제자 및 대학원 학생 연구지도와 연구활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나의 제자가 소위 ‘설랑동문회’ 이름으로 한해 두세 번 모여 우의를 돈독히 하며 지난 1년간의 연구활동을 소개하는 등 40년간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1980년 서울대학교 부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연구활동에 전념할 수 없었던 것은 몹시 아쉬웠으나 내 제자 그리고 연구실 대학원 학생이 나의 연구실을 지키며 내 분야인 발생생물학 연구에 큰 업적을 축적한 일은 나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교수직 퇴임 때까지 나의 발표 논문 수는 110여 편이 된다.
1974년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일 때 대학본부의 승인을 받고 미국대사관 AID 담당관과 교육차관금 획득을 위한 협의를 하였고 결국 5년간, 500만 달러 AID 차관금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동하면서 나는 새로 출범한 자연과학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이 차관 사업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 차관금은 80여 명 자연과학대학 교수를 1년 혹은 1년 반, 미국 내 대학교 혹은 연구기관에 파견하여 수행할 연구활동 지원과 귀국할 때 사용하던 연구용 기자재를 구입하는 데 배정하였다. 이 사업으로 자연과학대학 교수의 기초과학 연구수준이 일시에 향상되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과학기술력 향상을 위한 일을 소홀히 한 일이 없다.
나는 각종 국제기구의 임원으로 선임되어 우리나라 과학 연구수준 향상에 노력하였다. 1977년부터 2년간, 세계보건기구(WHO) 인간생식연구부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여러 나라 학자의 연구과제를 평가, 연구비 지원여부를 결정하는 사업에 참여하였고, 1990부터 7년간은 국제연합(UN)대학 신기술연구소(UNU/INTECH, 네덜란드 소재) 이사로 위촉되어 INTECH의 연구사업을 지원하였다. 또한 1994년부터 3년간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첨단연구사업부 국제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RIKEN에 제출한 기초과학자의 연구과제 평가사업에 종사하였다. 1995년 UNDP 주도로 후진국 어린이 전염병 예방용 값싼 백신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백신연구소(IVI) 유치위원장으로 선임된 나는 우리나라의 여건을 점검하기 위하여 방문 중인 미국 등 관련 학자 5명으로 구성된 연구소 입지선정위원회에게 서울대학교가 대학교 연구공원 내 5000평 부지를 제공하기로 하였고 정부가 5000평 크기의 연구소 건물을 건립, 지원할 것이라는 정부의 확고한 유치 및 지원의지가 있음을 밝혔고, 학계, 산업계 등 관련 단체의 연구소 설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확인한 입지선정위원회는 결국 우리나라를 연구소 유치국으로 결정하였다.
국제백신연구소 유치에 성공한 나는 1995년 ‘UNDP 국제백신연구소 설립추진 자문위원’으로, 그리고 1997년부터 2년간 연구소 사무총장이 결정되기 전까지 국제백신연구소 소장격인 ‘상주총괄이사’로, 그리고 ‘국제이사’로 연구소 초기의 기틀을 다졌다. 미국 NIH 연구부장을 국제백신연구소 소장으로 초청한 뒤에는 ‘연구소장의 특별고문’으로 연구소장의 직무를 지원하며 연구소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현재 외국의 과학자 50명을 포함한 80명의 연구요원이 후진국 어린이 전염병 예방용 값싼 백신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연구소 운영비 200억원 중 30%인 70억원은 정부가, 나머지 130억원인 70%는 후원금으로 보충하여야 한다. 25년 전 연구소 설립 때 한국후원회를 조직하였고 나는 후원회 초대 이사장으로, 그리고 현재는 후원회 상임고문으로 후원금 조달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다행히도 지난 20여 년 간, 빌 게이츠 재단이 총 1억5천만 달러를 후원하였고 정부의 지원 및 우리나라 국민의 도움을 받아 3년 전 후진국 어린이 콜레라 예방용 2000원의 값싼 경구용 백신개발에 성공하였다. 우리나라 벤처업체인 ‘유바이오로직스’가 값 싼 콜레라 백신을 생산하고 있고 우리나라 국제로타리클럽이 경구용 백신 공급에 소요되는 재원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해 연구소 창립 25주년 기념식에서 나는 ‘Founder’s Medal“을 받았다. 현재도 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 직함으로 연구소에 출근하며 연구사업을 돕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연구소 연구활동 지원을 위한 사업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일찍부터 정부기구 내 과학기술 관련 기구나 여러 단체의 임원 혹은 회원으로 참여하여 우리나라 과학기술력 향상을 위한 사업에 참여하였다. 첫째, 정부가 1979년 14개 대학에 용액화학 혹은 고체물리학 또는 분자생물학 등 기초과학 특정분야 연구과제를 지정하고 다른 대학 교수도 참여하는 ‘기초과학연구소’ 사업을 계획하고 이 연구소에 해마다 일정액의 연구비를 지원하였다. 내가 문교부 소속 기초과학분과위원회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고려대학교 김시중 교수, 연세대학교의 강영희 교수 등 7명이 연구소 평가위원회를 구성하고 매해 이들 연구소의 연구사업을 평가하였다. 특히 연구소의 목적이 우수 연구인력 양성이기 때문에 평가의 중점을 대학원 석,박사 양성과정의 강화에 두었다. 또한 이 연구사업에 참여한 연구소의 연구업적은 국제학술지 발표를 우선으로 하였다. 5년마다 연구소의 연구업적을 종합평가하여 연구비의 지급 증액 또는 연구비 지급 중단을 결정하였다. 1987년, 내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이 사업의 위원장직은 김시중 교수가 맡게 되었다.
이 사업으로 우리나라 기초과학 연구역량이 크게 향상하였으며 이 사업에 참여한 것은 내 생애 가장 큰 보람이다. 1980년 나는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과총)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당시 회장인 민관식 박사를 보좌하였다. 당시 과총은 임기 2년에 연임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초대 회장은 13년간 회장직에 있었다. 나는 과총 회장임기를 3년으로 하고 정부의 관여를 피하기 위하여 차기회장을 1년 전에 선임하는 회칙 개정안을 제시하였고 결국 민 회장은 6년 간 회장으로 봉사한 후 퇴임, 그리고 내가 3년 단임의 첫 번 째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과총 회장 임기 3년 제도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신임 과총 회장은 임기 3년 동안 과총 혹은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학회 발전을 위한 사업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런 사이 구관을 헐고 새로운 회관 건물을 건립하는 등 과총의 사업이 내실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회장 임기제한이었으며 세계 속의 과총으로 비약하고 있다. 이같은 과총의 발전상을 볼 때 나는 매우 뿌듯하며 나의 보람으로 느낀다.
나는 1987년 서울대학교 총장 취임 때까지의 7년간 이 사업의 위원장으로 봉사하였다. 또한 1979년 문교부 실험대학 평가위원장으로 2년간, 그리고 1985년부터 2년간 교육개혁심의회 위원으로 봉직하였고, 1989부터 2년간은 대통령 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으로, 1989년부터 2년간은 생산기술연구원 이사장으로, 그리고 1991년에 한국과학재단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1992년 교육부장관으로, 그리고 1993년 광주과학기술원(광주과기원) 설립위원장으로, 이어서 광주과기원 초대 이사장으로 3년간 봉사하였다. 1994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초대 원장으로 선임되어 선진국 과학술아카데미와 협력관계를 구축하였다. 1995년에는 과학기술처 생명공학 추진위원장으로, 2001년부터 2년간 국무총리실 정책평가위원회 위원장으로, 또한 2002년부터 6년간은 과학기술부 우수과학기술자상 위원장, 그리고 2006년부터 2년간은 과학기술부 원로과학기술자문위원회 위원으로 봉사하였다.
나의 지난날을 회상하면 나의 생애는 오로지 과학기술 분야 육성과 관련되었다. 이런 나의 지난날의 기여를 평가하고 우리나라 정부가 나에게 ‘과학기술 유공자’로 선정하였을 것이다. 나는 여생을 계속하여 과학기술 분야 발전을 위하여 봉사할 것을 다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