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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2021년 8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94세 현역의 꿈…“노벨상 수상자 꼭 봐야겠어요”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

원로에게 듣는다

94세 현역의 꿈…“노벨상 수상자 꼭 봐야겠어요”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


조완규 전 총장은 94세 나이에도 만보 걷기를 실천하고 있다. 만보 걷기에 도움을 주는 스마트밴드를 착용하고 있다.

조완규(생물46-52) 동문은 우리나라 생물학의 대부로 불린다. 1946년 문리과대학 예과부 이과 갑 2년을 수료하고 당시 1948년 신설학과인 생물학과로 진학했다. 3학년 때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해, 1952년 임시교사인 문리과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군인으로 참전하거나 납북 혹은 행방불명 등으로 동급생 중 조 동문 혼자 졸업했다. 조 동문은 대학원으로 진학 후 한동안 무급조교로 학과 일을 도왔다. 1957년 생물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됐다. 연구 및 실험시설이 부실하기 때문에 연필과 종이로 할 수 있는 인류유전학 혹은 집단유전학 분야 그 중 우리나라 출생아의 출생성비 연구에 집중했다. 그 결과 여아출생 100에 남아 출생이 110이라는 결과를 얻어 국제학술지에 발표하였다. 차차 실험 기자재를 갖추게 됨에 따라 배양법을 개발하여 생쥐 난소기능 그리고 미성숙난자의 성숙과정을 관찰하는 등 발생생물학 관련 분야 연구자의 길을 걸어왔다.
지금도 94세의 현역 과학자다. 20여 년 전 UNDP가 주도하는 국제백신연구소(IVI)의 한국 내 유치에 성공한 후 연구소 사무총장 특별고문으로 IVI의 기틀을 다졌고 그 후 한국후원회를 조직해 이사장, 그리고 현재는 후원회 상임고문으로 연구소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교육행정 경험도 많다. 1987년부터 4년간 서울대학교 총장직에 있으면서 학칙 중 학생의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총장의 학생징계권을 교수회의에 넘기는 등 대학 자율화를 정착시켰고, 1992년부터 1년 반 교육부장관직을 봉직했다. 나이 90을 넘긴 지금도 과학계 단체 임원으로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 지난 8월 9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후문에 위치한 국제백신연구소(IVI)에서 조 동문을 만나 삶의 발자취를 들었다.

-생물학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요?
 “1946년 문리과대학 예과부에 이과 갑과 이과 을이 있었습니다. 기초과학분야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이과 갑’을, 그리고 의학 분야로 진학할 학생을 ‘이과 을’을 택하게 되어 있었지요. 당시 부모님은 의사되기를 바라고 ‘이과 을’ 선택을 권하셨지만 나는 화학에 흥미가 있어 장차 화학자 되기를 바라고 ‘이과 갑’을 택했죠. 예과부 2년을 마친 1948년 90여 명이 화학과로 진학하는 것을 보고 나는 대신 15명의 학생이 선택한 신설학과인 생물학과를 택했습니다. 생물학과에서도 화학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그리고 예과 때 재미있게 읽은 다윈의 진화론, 파브르 곤충기 등이 생물학을 택하도록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설학과라 기자재 등이 불비했으나 생물학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생물학과를 선택한 것이 잘했던 것 같아요.”

-당시 우리나라 생물학 수준은 어땠나요.
“수준을 비교할 처지가 못 됐죠. 실험실에 학생 실험용 현미경 3대와 정온기 그리고 저울뿐이었어요. 그래서 종이와 연필로 할 수 있는 인류유전학 혹은 집단유전학을 택했지요. 그 가운데 우리나라 출생성비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아 출생 100에 남아출생은 105-106이지만 1937년 영국 학자는 한국의 출생성비가 113으로 남아출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하였고, 한편 일본인 내과 교수는 100으로 가장 낮다고 발표했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가를 확인하고자 이 문제를 연구과제로 택했습니다. 종합병원 혹은 산부인과 병원의 출산기록, 그리고 주부를 찾아 출산경력을 조사했지요. 그 결과 남아 출생률이 110이며 남아출생비율이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던 중 대일청구권자금, IBRD 자금 등으로 실험실 기자재가 갖추어짐에 따라 통계연구에서 실험실연구로 전환했습니다. 생체의 인공배양법을 이용하여 생쥐 난자의 성숙과정 혹은 생쥐 미성숙난자의 성숙 유도 등 발생생물학 분야를 택하고 이 분야 연구에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물론 연구에서 얻은 결과는 국제학술지에 발표했지요.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3학년 때 터진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했고,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리고 그곳으로 피난 온 성신여자중고등학교 생물학 선생으로 취직했지요. 선생 수가 부족하여 생물학 외에 화학, 영어, 독일어도 가르쳤죠. 당시 학부모는 딸의 고등학교 졸업으로 만족하던 때여서 대학까지 보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가정방문해 딸을 대학에 보내도록 학부모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내가 담임을 맡았던 학생 중에서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혹은 성균관대학 등으로 진학했고 교장선생으로부터 칭찬받은 일이 기억납니다.”

-교육행정가의 길을 걸으시면서 연구를 접으셨는데, 아쉬움이 있으시겠어요.
“왜 없겠어요. 자연과학대학 학장 시절 교수 공채제도 도입 그리고 연구비 중앙관리제를 확립했으며, 이 같은 새로운 제도는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으로, 그리고 끝내는 전국 대학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어 큰 보람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자연과학대학장 때도 계속 대학원 학생을 지도하며 연구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총장으로 취임한 고병익 교수가 나를 부총장으로 임명할 것이라며 교수직 사표를 내라고 하여 몹시 당황했어요. 그동안 부총장은 교수직을 그만두고 취임했다고 하더군요. 행정직보다 대학원 학생 지도와 연구로 세계적 업적을 축적하는 것이 나의 평생 소원인데 단지 2년 임기의 부총장을 하겠다며 50대 초반에 교수직을 사표 낼 수는 없었지요.
문교부는 나의 설득을 받아들여 부총장도 학장처럼 보직으로 규정한 대학법을 국무회의 의결 후 국회에 이송했으나 10·26 사태로 국회가 해산함으로써 개정법은 그대로 계류된 채 다음 해로 넘어갔습니다. 결국 1980년 3월 부총장직을 사표내고 실직자가 됐습니다. 그 뒤 총장으로 부임한 권이혁 교수의 배려로 다시 신규채용 절차를 밟아 교수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1993년 교수직 퇴임 후에도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내에 설립된 국제백신연구소 내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어서 1946년 서울대학교 입학한 후 오늘날까지 서울대학교 땅을 밟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1987년에 서울대학교 총장을 맡아 오랜만에 4년 임기를 채웠는데 가장 큰 보람이라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대학 자율화에 많은 힘을 쏟았어요. 당시 민주화운동으로 1000여 명 학생이 제명되었는데 이는 학칙에 명시된 정치활동 금지 조항을 위반하였다는 것입니다. 반정부, 민주화 쟁취 등을 내걸고 시위하다 경찰에 잡히고 그 명단이 대학에 전달되면 총장이 서명하고 그러면 바로 제명되는 그런 때였지요. 선거권, 피선거권이 있는 나이에 이른 학생의 정치적 견해로 제명처분하는 것은 합리적이 아니어서 학칙 가운데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징계권을 교수회의로 이관하는 학칙개정안을 정부에 승인요청했지요. 그러나 정부는 서울대학교가 승인 요청한 소위 ‘자율학칙’을 3개월이 지나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학칙을 승인하지 않으면 총장직을 사퇴할 것이라고 문교부에 통고했습니다. 결국 서명원 문교부 장관은 새로운 학칙의 승인을 다음 장관에게 맡길 수 없다며 소위 서울대학교가 요청한 자율학칙을 승인하고 장관직을 물러났습니다. 학칙 승인 후 대학은 오히려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총장이 되니까 세계 여러 대학교 총장이 서울대학교와 학술교류를 제안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망설였습니다. 학술교류차 우리 대학 교수를 4, 5명 보내면 우리도 교수 4, 5명을 받아야 하는데 우선 숙박시설이 없고, 컴퓨터 시설이 완벽하게 갖춘 외국의 대학교수가 컴퓨터 시설이 없는 서울대학교에 와서 불편할 것이 염려됐고, 도서관 시설, 자료 혹은 이용이 거의 구식인 것이 이유였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고 이 회장은 즉시 나의 부탁을 받아들여 1990년 9월 단기, 장기체류 초빙교수의 숙박시설과 이들의 식사 및 회의시설인 회관, ‘호암교수회관’을 건축 기증했습니다. 호암교수회관으로 인하여 서울대학교는 일시에 세계 대학으로 부상하게 됐습니다. 또 이 회장은 60억을 투자하여 대학본부, 도서관 그리고 관악, 연건, 수원 캠퍼스에 컴퓨터 랜을 시설해서, 연구실에서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한화가 경향신문을 인수하는 대가로 청와대에 기증한 240억원을 서울대학교로 보내와 그 재원으로 도서관 체재 개편에 이용했습니다. 이 회장, 그리고 한화 그룹이 기탁한 재원으로 서울대학교가 세계 대학으로 부상하는 데 기여한 것을 총장 재임 중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와 같이 고생한 처, 실장 등 대학 보직자의 협력이 있어 대학 자율화 정책과 대학 세계화 그리고 안정화가 가능했습니다.”

수상자 발굴 사단법인 발족
“후보 될만한 연구자 여럿”

1994년 국제백신연구소 유치
김경진·이건수·최재천 등 제자
심포지엄 발표는 모두 영어로



대담 : 방문신 (경영82-89) SBS 논설위원

-노태우 정부 마지막 교육부 장관도 하셨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소개해주신다면?
“서울대학교 총장 때 수시로 시위 학생 동향을 묻는 문교부 국장의 전화를 받고 매우 불쾌했어요. 학생 수, 구호 혹은 진행상황을 총장에게 직접 물어보는 겁니다. 학생처장에게 알아보라고 일러주곤 했지요. 장관 취임식 때 교육부 공무원에게 대학의 자율성을 지원을 강조했습니다. 장관 된 지 얼마 안 돼서 각 신문에 장관 이름으로 각 대학 총장에게 학생지도를 철저히 하라는 훈시를 보냈다는 기사가 났어요. 학기 초 관례라며 변명하는 대학담당 국장이 실은 대학에서 근무해 본 일이 없다고 하여 그를 바로 지방대학 사무국장으로 내려보낸 일이 있어요. 노태우 정부 말기, 공무원이 나태해질 것이 염려되어 그 같은 인사조치를 했지요. 정부 본부 국장을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것은 일반적으로 좌천이라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그 공무원은 충격을 받았는지 1년 후 암으로 타계하였습니다. 한 1, 2년 지방 근무 후 다시 교육부로 불러올릴 생각이었지요. 어찌 되었든 정부 말기 교육부 기강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천대학교 개혁을 추진한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인천대학교와 문교부가 유착관계에 있다며 대학에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를 시정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며 인천시민 대표의 진정서를 받았어요. 교육부 감사를 내보내 학사행정 전반에 걸쳐 감사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왔습니다. 결국 설립자인 백 모 장군과 협의 끝에 인천대학교를 인천시립대학교로 개편했습니다. 현재는 국립대학교로 승격했지요. 이처럼 인천대학교 개혁에 기여한 점 큰 보람입니다.”

-국제백신연구소(IVI)가 한국에 유치되기까지 큰 역할을 하셨지요?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상황에서 국제기구를 유치 지원하는 것이 국위선양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1990년대 초 UN에서 모인 70여 개국 정상이 매년 콜레라, 말라리아 혹은 장티푸스 등 전염병으로 숨지는 400만 명의 개발도상국 어린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값싼 백신을 개발할 국제백신연구소(IVI) 설립문제를 다뤘습니다. UN개발계획(UNDP)이 여러 나라에 IVI설립을 권유했습니다. 설립조건은 5000평 부지위에 5000평 크기의 연구소 건물을 짓고 연구용 기자재 구입비 600만원 제공과 연간 운영비 200만 달러 중 30%인 70만 달러를 부담하는 것입니다. 연구소 유치를 바라는 학자들로 유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설득했습니다.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여러 나라의 도움으로 성장을 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1995년 UN창립 50주년 기념연설에서 ‘대한민국이 세계 어린이 전염병 퇴치를 위하여 국제백신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하였다’며 연구소 유치의 굳은 의지를 밝혔습니다.
결국 여러 나라와의 경쟁 끝에 우리나라가 연구소 유치에 성공했습니다. 1995년 서울대학교 내에 개소한 연구소는 2003년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내에 현대식 첨단연구소를 건립했습니다. 정부가 지원하는 운영비 30% 외 70%를 충당하기 위해 학자와 기업체로 IVI 한국후원회를 조직하고요. 다행히도 20년 동안 빌 게이츠 재단이 1억 6천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결국 연구소는 수 만원 하는 콜레라 예방약 대신 단돈 2천원의 값싼 경구용 백신개발에 성공했지요. IVI에는 외국에서 초청된 연구원 40여 명을 포함한 70명의 연구원이 새로운 값싼 전염병 예방용 백신 개발을 위해 활발히 연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소는 우리나라 생명과학 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연구소는 그동안 서울대학교 내 시설을 이용했지만 2003년 연구공원 내에 연구소 본 건물이 준공됨으로써 세계 유일 백신개발 중심체로 그 역할을 다 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연구소 한국후원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이후 관례로 역대 대통령 영부인이 명예회장직을 맡아 크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값싼 콜레라 등 전염병 예방용 백신을 개발해도 채산성 때문에 제약회사가 백신 생산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애초 인도의 한 제약회사가 IVI가 개발한 백신을 싼값으로 생산하기로 했지만 이를 포기하여 난감하던 중 백영옥(수의과대학 출신) 후배가 벤처회사인 ‘유바이오로직스’를 조직하고 춘천에 IVI가 개발한 백신을 생산할 목적으로 공장을 세워 이 곳에서 값싼 콜레라 백신 ‘유비콜‘ 생산에 나섰습니다. 이미 4천만 도스의 ’유비콜‘을 생산해 네팔 등 저개발국에 공급했고 따로 4천만 도스의 ’유비콜‘을 생산 비축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서울의 3640지구 국제로터리클럽이 콜레라 접종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원하고 있으며 장차 전국 국제로타리 클럽의 백신 공급 사업을 지원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백신 개발도 하는지요?
“국제백신연구소는 제약회사가 하는 영리목적의 분야는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코로나 백신 개발 연구는 대상이 아닙니다. 다만 제약회사 협의체를 구성하여 IVI가 취득한 백신 개발 노하우를 나누고 있습니다.”

-많은 과학기술단체를 만드셨습니다. 유전공학 학술협의회, 한국 바이오 산업협회, 과학기술한림원의 초대 원장을 지내셨는데 한국인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배출은 여전히 꿈일까요?
“1990년도에 4년간 일본 리켄(RIKEN)연구소 자문위원으로 봉사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일본에는 그간 25명의 노벨과학상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리켄 소속 과학자가 여러 명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리켄은 매년 노벨상 수상자 혹은 그 급에 있는 과학자를 초청해서 연구과제 자문 혹은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최고급 호텔을 숙소로 제공하는 등 극진히 대접합니다. 연구과제 자문 및 평가 사업을 위하여 연구개발비의 상당 액수를 배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계 혹은 연구계는 연구과제 자문과 평가를 위하여 국제적 학자를 초빙하는 예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전문가에 의한 자문 및 평가로 인하여 연구업적 효과가 배가하지만 우리는 이를 위한 비용을 낭비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노벨과학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있는 과학자가 여럿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노벨상 수상자 혹은 그 급에 이르는 학자를 초빙하여 우리 학계를 소개하고 자문 혹은 평가를 받고 그들과 공동연구를 추진하는 등 적극적으로 우리 과학계 동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노벨상은 어제, 오늘의 연구업적이 아니라 젊었을 때 수행한 연구가 창의성이 있고, 그 연구 결과가 인류복지 증진에 어떻게 기여하였는가를 평가하고 주는 상이라 수상자 나이는 60대 혹은 70대입니다. 최근 나는 젊은 과학자의 창의성, 능력, 의지 그리고 추진력을 보고 노벨상 수상자 배출이 가능하다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10년 전부터 S-오일이 매해 박사학위 취득자 중 우수논문을 선발해 시상하는 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연구내용이 거의 세계 수준급에 이르고 있음을 보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연구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면 분명 이들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들이 계속 연구 활동을 수행할 체제가 부실합니다. 대학은 정원에 막혀있고 각종 연구소는 연구재원 이유 때문에 이들의 활로는 막혀 있는 상태입니다. 만일 이들이 연구활동을 계속할 수만 있다면 30년 혹은 40년 후 분명 노벨과학상 수상 후보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최근 노벨상 수상 가능한 과학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최근 노벨상 수상자 발굴을 위한 ‘사단법인 과학키움’ 이라는 조직을 구성했습니다. 화장품 회사인 올 네이션(AN) 박성율 회장이 필동에 사무실과 비용을 제공하는 등 이 사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박 회장의 지원으로 매년 노벨상 수상자 혹은 그 급의 학자를 초청해 우리나라 과학자 연구과제 자문, 혹은 우수 과학자를 노벨상 수상식에 파견하여 그곳 학자와 공동연구 가능성을 타진하게 하는 등 그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원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내 생전에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배출되기를 소망합니다.”

-총동창회가 매월 주최하는 조찬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계십니다. 그 관심과 열정에 놀라는 분들도 많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매달 2회 공부 모임을 갖는 곳도 서울대총동창회뿐일 겁니다. 연사 섭외도 쉽지 않을 텐데 이희범 회장님의 열의가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이 명문인 것은 모교발전을 위한 기금 조성 등 동문의 적극적 참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 이희범 회장님의 각별한 동문 활동이 모교 발전에 큰 획이 되기를 갈망하며 다른 전임 총장 등 대학 간부의 참여가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동창회가 잘 돼야 모교도 발전합니다. 저는 전임 총장으로서 계속 동창회 조찬 모임에 참석해 이들과 뜻을 같이할 생각입니다.”

-동문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다면?
“서울대학교는 우리나라 수재가 모인 최고 고등교육기관이며 졸업생들은 우리나라 각계각층에서 기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수준이 바로 우리나라의 문화수준입니다. 이런 점 서울대학교의 위상과 역할은 우리나라 발전에 절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우선 교육재원의 부족을 들 수 있습니다. 여러 해 전 서울대학교가 특수법인체가 됐지만 여전히 재원이 충족하지 않습니다. 10월 노벨상 수상자 발표 때마다 우리나라 국민은 서울대학교에 기대합니다.
그동안 20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보다 못할 것이 없는데 어째서 우리는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가 하고 묻는 국민이 많습니다. 이 점 과학자로 그간 제자를 키워 온 사람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간 대학 입학을 위한 주입식 교육으로 우리 국민의 남다른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한 점, 그리고 대학 육성을 위한 국민의 기여가 충족하지 않은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30여 년 전, 서울대학교 학술진흥재단과 장학재단을 통합하여 ‘발전기금’ 재단을 발족시켰으며 기금 적립에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동문의 적극적 관심과 기탁으로 기금조성의 확충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건강 비결 들려주세요.
“건강비결에 3가지를 듭니다. 첫째, 소식입니다. 보통 사람의 3분의 1 정도입니다. 낮은 우유 한 컵으로 그칩니다. 두 번째는 운동입니다. 1975년 이래 아침 집 근처 서리풀 공원에 나가 그곳에 설치한 운동시설을 이용하여 허리, 팔, 다리 운동을 한 후, 약 7000보를 걷습니다. 하루 걷는 보행 수가 평균 만보가 됩니다. 오늘도 공원에 나가 걷기운동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욕심이 없으니 스트레스가 없고 늘 마음이 편합니다. 그간 공, 사간 여러 단체 임원이 되었지만 어느 하나도 내가 하겠다고 나선 것은 없습니다. 밀려서, 혹은 받들려서 자리를 맡지만 일단 맡으면 열심히 봉사합니다. 마음 비우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가능합니다. 94세이지만 나이를 잊고 살고 있습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늘 사무실로 출근하여 주어진, 혹은 찾아 하는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건강의 요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내자의 뒷바라지도 나의 건강에 긴요한 요건이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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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대부와 설랑(雪浪) 문하생들

조완규 동문의 호는 설랑(雪浪)이다. 한학자였던 장인이 60년대 중반에 지어주었다고 한다. 양양 낙산사 앞 겨울바다에 내린 흰 눈이 마치 눈(雪)의 물결(浪)처럼 보였는데 그 풍광이 인상적이어서 이를 사위의 호로 만들어 준 것이다.  조완규란 이름이 주는 딱딱한 어감을 부드럽게 해준다는 생각도 있었다. 조 동문 본인도 아주 맘에 들었는지 그때부터 줄곧 애용하고 있다.

이런 연유 때문에 조완규 동문 제자들은 ‘설랑 문하생’이라고 불린다. 조 동문이 36년간 교수생활을 하면서 배출한 석사 30명과 박사 18명을 중심으로 한 제자들 모임이다. 자랑하고 싶은 설랑 문하생을 꼽아달라고 하자 3명을 언급했다. 뇌과학 연구자인 김경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 이건수 서울대 분자생물학 교수,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이야기했다.

설랑 문하생들은 1년에 세 번의 모임을 갖는다. 신년 모임, 5월 스승의 날 모임, 8월 ‘설랑 심포지엄’ 모임을 조완규 동문과 함께 한다. 특이한 점은 ‘설랑 심포지엄’ 발표는 모두 영어로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쟁자는 국내가 아닌 글로벌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조 동문이 사단법인 과학키움의 ‘노벨상 수상자 발굴 위원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를 향한 94세 설랑의 꿈을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