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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호 2023년 5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기정학의 시대, 과학기술과 외교·안보 협업 강화해야


기정학의 시대, 과학기술과 외교·안보 협업 강화해야




이태식
토목73-78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모든 기술 지원 사실상 불가능
전략적 지원 기술 선별 불가피
국가는 우호적 안보 환경 조성
민간주도 및 민관 협력 바람직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나라 헌법 127조 1항이다. 과학기술이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 여겨지던 헌법 개정 당시의 인식이 여실히 드러나는 문구다. 그러나 요즘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눈여겨보는 사람이라면 과학기술이 경제 발전의 수단이라는 인식이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왔음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과학기술과 산업, 안보가 긴밀하게 연결된 ‘기정학(技政學)’의 시대다. 글로벌 리더십을 둘러싼 패권경쟁의 단어 앞에도 당연하다는 듯 ‘기술’이 붙어 기술패권경쟁의 시대라고도 한다. 기술적 우위가 국제정치의 패권을 좌우하는 핵심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만큼 국가들은 첨단기술을 현재의 경쟁력을 담보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미래의 경쟁력을 다투는 핵심 조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연계된 정치가 오늘날 국제질서의 현실이자 환경이 되었다. 그 속에서 각국은 경쟁국을 견제하고 자국의 과학기술 혁신과 첨단기술 기업에 조금이라도 더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제정, 중국의 희토류 수출 규제 강화, 유럽의 탄소국경세 도입 등은 모두 글로벌 기술패권경쟁의 조각이자 우리나라에 드리워진 먹구름 같은 장벽이다.

기정학의 시대에서 치밀하고 치열해지는 각국의 전략에 맞서 우리나라도 기술주권을 확보할 수 있는 효과적인 국가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모든 기술 분야를 지원하고 투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양궁처럼 우리나라가 가장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술을 선별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키워낼 정책 수립 및 시행이 시급하다. 국가적 차원의 정책 방향 아래 이를 이행할 로드맵을 수립하고, 법제도를 보완하며 추진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작년 10월, 1년여 동안의 숙의를 거쳐 12대 국가전략기술이 선정, 발표되었다. 이 같은 내용이 반영된 ‘국가전략기술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올해 3월 제정되었다. 기술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밑그림은 일단 그려졌으니, 이것이 차질 없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합심하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부처 간, 정책 간 칸막이를 없애고, 제도적 걸림돌을 제거하며, 국내·외적 변화를 민감하게 주시해야 한다.

또한, 이렇게 전략기술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민간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제는 국가 주도식 개발 방식에서 탈피해 민간의 역량을 강화하고 민관 협력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신 국가는 정부 R&D 투자에서부터 우호적인 안보, 외교적 환경 조성까지 과학기술 혁신과 첨단기술 기업들을 지원 사격하는 것에 역할을 집중해야 한다. 민간이 혼자서 할 수 없는, 정부의 역량이 중요한 영역이다.

국가 간 협력과 동맹 관계를 잘 활용하는 것도 국가 전략기술 확보를 위한 길이 될 수 있다. 이미 세계는 양분되고 있고, 공급망은 동맹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미중 사이의 줄타기는 우리나라의 숙명 같은 일이지만, 최근의 시류를 보았을 때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것은 적절하면서도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보복 등 우리나라에 미칠 부정적 파급 효과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강화된 한미 협력을 과학기술 분야로 적극 확대하는 노력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방향일 것이다.

지난 4월, 윤 대통령의 미국 순방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 간의 과학기술 동맹이 더 끈끈해지고 있다. 이달 중 미국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 실장이 과학기술 주요 인사와 함께 대규모 방한을 할 예정이라 다양한 방면의 협력이 기대되고 있다. 우주 탐사뿐 아니라 양자, AI, 바이오 등 협력 분야도 넓어지고 있다. 과학기술만큼 협력의 효과가 큰 분야도 없다. 이 계기를 잘 살려 우리나라 과학기술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이나 유럽 등의 국가와도 협력을 확대해나가야 한다. 산업적 차원에서 공급망을 다변화할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기술패권 경쟁의 구도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해나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에서도 기정학적 관점에서 일본의 소재, 부품, 장비업체들이 한국의 생태계에 편입될 수 있도록 전략을 짜는 사고의 전환도 고려해 볼 만하다.

과학기술이 국가 간 경쟁의 핵심으로 떠오르며 과학기술과 외교·안보가 더욱 밀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외교·안보와 과학기술이 별개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다루어지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과학기술을 아는 외교 전문가와 외교·안보를 잘 아는 과학기술 전문가가 우리나라에 몇이나 있을까? 기정학의 시대, 무한 기술경쟁 속에 우리나라가 승리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계와 외교·안보가 더욱 가까워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