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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호 2023년 4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양국 정부, 한·일 민간교류 막지만 말아 달라”

김덕길 가네다홀딩스 회장·일본총동창회 회장


“양국 정부, 한·일 민간교류 막지만 말아 달라”

김덕길 (영문66입)
가네다홀딩스 회장·일본총동창회 회장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재일교포로는 첫 기부

경제·안보 일본과 협력 절실
“중국 상대에도 일본 활용해야”

한·일 해저광케이블 숨은 주역
“사할린 동포에게도 관심 갖길”


최근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한 재일 교포가 기부에 나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주인공은 일본총동창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덕길 가네다홀딩스 회장. 김 회장은 “정부의 강제징용 배상 해법 발표에 대한 한국 내 부정적인 반응을 보고 재일 교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해 기부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30여 년간 일본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한일 교류를 위한 활동에도 앞장서 왔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한국에 득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오사카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세 자녀에게 울산(학성) 김씨 족보를 나눠줄 정도로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이 크다. 지난 4월 2일 서울 인터컨티넨탈 파르나스호텔에서 김덕길 동문을 만났다.



대담 : 신예리 (영문87-91) JTBC 자문역


-한국엔 어떤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휴가 중입니다. 일이 없어도 평소 한국은 자주 들러요. 조상님들의 묘소도 한국에 있고요. 아버님 고향이 울산입니다.”

-최근 한국 정부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한 배상 방안을 발표하자 앞장서서 기부 의사를 밝히셨는데 어떤 마음에서 내린 결정인가요.
“한국 정부에서 그런 방안을 발표했을 때, 부정적인 여론이 많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라도 빨리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제뿐 아니라 안보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간 저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이번 기부도 그 연장선에 있지요.
제가 보는 한국은 위기 상황입니다. 북핵 위기만 해도 일본과 협조하지 않으면 대응이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또 북한 문제를 풀기 위해선 중국의 역할이 중요한데 중국과 협상을 할 때도 한국이 독자적으로 하는 것보다 일본과 협력해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동문은 이 대목에서 중국 외교 사령탑인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사판공실 주임과의 친분을 언급하기도 했다.
“왕이 위원이 주일 중국 대사를 지냈잖아요. 대사 직책을 맡기 전부터 한 모임에서 만난 뒤 우정을 쌓아왔습니다. 과거에 한국과 중국이 모두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었다는 공통분모가 있어 금방 친하게 됐죠. 일본 경제계에도 둘 사이가 알려지다 보니 중국과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한테 찾아올 정도였죠. ”

-중국을 설득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공동 전선을 펴야 한다는 지적은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한일 관계의 개선이 필요할 텐데 아시다시피 한국 내에선 일본 정부의 사과나 가해 기업의 참여가 없는 상태에서 재단을 통한 배상을 추진하는 것에 반대 여론이 높습니다. 기부를 결정하실 때 이런 점이 부담되진 않으셨나요?
“눈치보지 말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재단이 설립되면 한일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고, 그래서 누구보다 먼저 기부 의사를 밝힌 겁니다.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을 민간에서 나서서 해야 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일본에는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후손들이 여럿 살아 계셔서 그 분들의 아픈 사연을 평소에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징용 피해자 세 분이 재단을 통한 배상에 거부 의사를 밝히셨다고 들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 뵙고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김 회장은 이번뿐 아니라 한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재일교포들이 솔선수범했던 사례도 소개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대회를 치를 예산이 부족하다고 해서 5000만엔(당시 원화 7억5000만원 상당)을 기부했고 여럿 교포분들이 동참하셨습니다. 또  1997년 외환 위기 때는 한국에 달러가 부족하다고 해서 미국과 일본에 있는 외화 예금을 한국의 은행으로 옮기기도 했어요.”

-한일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재일 교포들이 힘들어지고, 특히 젊은 세대가 애로를 겪는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상황도 이번 기부에 영향을 미쳤겠지요.
“사실 지금의 교포사회는 과거와 달라졌어요. 한일 관계의 좋고 나쁨이 생계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들 아주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요.”

-과거와는 달라졌다니 다행입니다. 얼마 전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드라마 ‘파친코’를 통해 한국에서도 재일 교포들의 신산했던 삶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회장님께선 1946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자라셨다고 들었는데 당시에는 일본 사회에서 적지 않은 차별과 핍박을 겪지 않으셨나요.
“우리 세대는 아무리 똑똑해도 진입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어요. 변호사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던 게 한 예죠. 제가 어렸을 때 일본 아이들과 싸움을 많이 했는데 당시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 사람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몇 년 사이 아버지 사업이 커지면서 동생들은 저 같은 일은 안 당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집 입구에는 늘 태극기를 걸어 두었는데 아버지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란 점을 강조하시면서 한국인으로 당당하라고, 일본 아이들에게 공부든 싸움이든 지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앞서 과거보다 재일교포의 삶이 좀 나아졌다고 하셨는데 그럼 지금은 차별이 많이 줄어든 건가요.
“공식적인 차별은 없어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야 왜 없겠어요. 한국에서도 출신과 학교를 따지는 분들이 있듯이, 재일 교포에게 색안경을 낀 일본 기업도 여전히 존재하죠. 그런 차별까지 사라지려면 한 세대는 더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 일본 내에서도 K팝과 드라마·영화 등 한국 문화와 한국 음식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이 재일 교포 청년 세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진 않나요.
“맞습니다. 최근 조카의 딸이 일본 친구들과 한국의 한 대학 어학당에서 6개월 공부하고 왔는데요. 그 친구들이 저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더라고요. 제가 자녀 셋을 두고 있는데, 막내 딸이 일본 외무성에서 외교관으로 꽤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재일 교포라는 강점을 십분 활용해서 한국 관련 네트워크를 잘 구축한 덕분이라고 합니다.”

-회장님은 일본에서 부친께서 물려주신 건설·부동산업을 해 오다가 IT 사업까지 영역을 넓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호기심이 많아요. 1983년 오사카대 출신들을 모아 소프트웨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에선 소프트웨어 사업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거든요. 한국의 전자산업연합회가 우리 회사를 방문해 소프트웨어 산업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돌아가기도 했죠. 한국이 일본보다 한 발 늦게 눈을 뜬 건데 지금은 일본을 뛰어넘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정말 대단하죠.”

-현재 운영하고 계신 가네다홀딩스는 어떤 회사인가요.
“태양광, 부동산, 콘텐츠 회사 등을 거느린 지주회사입니다.”

-재일 교포로서 차별과 편견을 뚫고 사업가로 성공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비결은 무엇이었는지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은 신용이 중요합니다. 부친이 고생하시면서 쌓아온 신용 덕분에 다행히 큰 어려움 없이 가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일본서 나고 자라셨는데 서울대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한국에 친척을 만나러 왔었어요. 일본밖에 모르고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일본으로 돌아와서 무작정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한국의 대학교에 입학할 방법이 없는지 물어봤습니다. 대사관 직원이 서울대학교에 해외 교포를 위한 입학 전형이 있으니, 한번 도전해 보라는 겁니다. 당시 한국말을 거의 못 했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1년간 한국어를 익힌 뒤 들어갈 수 있었죠. 영문과를 택한 것은 다른 과목에 비해 한국말이 서툴러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아서, 중간에 공대로 전공을 바꿨죠. 공대의 경우 수학 공식은 이해할 수 있고, 무엇보다 원서 수업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아버님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졸업하지 못하고 중간에 일본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김덕길 동문이 지금까지 간직한 서울대 연구생증, 도서관 열람증, 학생증.


-대학 시절 인상에 남는 경험은 어떤 게 있나요.
“아버지가 굉장히 엄한 분이셨는데 서울대에 간다고 하니까 반색하시며 롤렉스 시계를 사주셨어요. 그걸 차고 다니다 일주일 만에 소매치기를 당했죠. 당시 롤렉스 시계를 신세계백화점에서 판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가 봤는데 제 시계를 찾을 순 없었어요. 체념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나오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그런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이유를 물으시더라고요. 제 얘기를 듣더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우리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큰 위로가 됐지요. 그분이 지휘자 금난새씨의 어머니이십니다. 그 인연으로 금난새씨와는 지금도 친하게 지냅니다.”

-서울대 일본총동창회 회장도 맡고 계신데요. 회원 수는 얼마나 되고, 주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코로나로 통 모이지 못하다 작년에 모임을 했는데, 젊은 친구들이 많이 왔어요. 25명 정도 모였죠. 현재 등록된 분은 130명 정도 되는데 연락되는 분들은 70여 명 정도 되는 것 같아요. 활성화를 위해 제가 노력을 좀 더 하려고 합니다.”

-일본총동창회장으로서 일본과 한국 사이의 유대감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양국 정부가 민간에서 하는 다양한 교류를 막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 주기만 해도 좋겠어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자매도시가 참 많거든요. 분야별 학술회의도 많고요. 경찰 등 공무원끼리의 모임도 있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교류가 끊겼는데 코로나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양국 협력의 물꼬도 트였으니 본격적으로 교류가 재개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사를 읽게 될 서울대 동문 선후배들에게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들려주십시오.
“어느 나라나 엘리트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유럽을 보면 엘리트는 별도의 기관에서 육성되잖아요? 국가를 위해 사익은 버리라는 의미죠. 서울대가 한국에서는 그런 대학인데, 그에 걸맞게 큰마음을 품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정리=김남주 기자



김덕길 회장은

1946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오사카 시립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국의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한다. 1966년 모교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곧바로 공학부로 과를 바꿨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부친의 사망으로 사업 승계를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건설·부동산업이 1970년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타격을 입자, 1983년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하고 AIS그룹을 일구었다.

김 동문은 2002년 부산과 일본 후쿠오카를 연결하는 해저광케이블 네트워크 사업의 숨은 주역이다. 1년 가까이 한국과 일본을 번갈아 오가며 KT와 큐슈전력을 설득, 수년 동안 늦어졌던 광케이블 개통이 현실화되는 데 일조했다.

또 그는 재일교포 사회에서 마당발로도 통한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을 전개하면서 일본의 재계 및 관계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발판으로 한일 경제인간담회, 한일 청년포럼, 한일 IT포럼 등을 이끌며 민간 외교에 앞장서 왔다. 최근에는 사할린 동포의 귀국을 돕는 일에 큰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사업을 정리하고 ㈜지바에너지와 ㈜MANGARAK(콘텐츠 회사)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일한간화회 공동의장, Korea IT Network-Japan 회장, 동경대학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