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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021년 10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임신 10개월의 경험과 감정, 총대 메고 카메라로 표현했죠”

건축과 출신 영화감독 남궁선 


“임신 10개월의 경험과 감정, 총대 메고 카메라로 표현했죠”
 
건축과 출신 영화감독 남궁선 



학생 때 단편으로 영화제 수상
첫 장편 ‘십개월의 미래’ 개봉 


“첫 장편 개봉 소감이요? 거의 출산이죠. 세상에 자식을 떠나보내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자신의 경험과 신작 영화의 주제를 절묘하게 닮은 답이었다. 10월 14일 장편 데뷔작 ‘십개월의 미래’ 개봉에 앞선 남궁선(건축00-04) 감독의 소감이다.   

‘십개월의 미래’는 공대 출신 개발자인 29세 여성 미래가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겪는 10개월간의 이야기. 건축학과 졸업 후 한예종 영화과에 진학, 단편 하나하나 주목받은 남궁 동문이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끝에 내놓은 작품으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앞다퉈 초청하며 기대를 모았다. 개봉을 보름 앞둔 9월 28일 잠원동 배급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출산을 경험하면서 겪었던 어떤 감정들이 있는데 대중문화에서 보이지 않더라고요. 이 경험을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할 텐데, 왜 영화가 없을까. 전 직접 글을 쓰는 감독이고, 만들고 싶은 수많은 영화가 있었지만 지금 세상에 내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방향을 틀었습니다. 총대를 멘 거죠.” 

세상을 놀라게 할 기술을 꿈꾸던 주인공 미래는 임신이라는 ‘변수’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임신이라는 단일 사건이 부모님과 남자친구, 예비 시댁, 회사에겐 다르게 해석되고, 그 가운데 코딩을 하듯 오류 없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성정이 더욱 일을 간단치 않게 만든다. 

우왕좌왕 하는 사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10개월이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숨차게 달려가지만, 숨구멍을 터 놓았다.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상황도 ‘정색 유머’와 1970년대를 풍미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음반을 한 장 한 장 들으며 추렸다는 옛 가요들로 눙치는 솜씨가 대단하다. 그 사이 미래는 당차게 자신만의 선택을 내린다. 

“‘웃프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간이란 존재는 완전하지 않고, 그 불완전함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으로서 유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진지하게 보면 한없이 진지해질 수 있는 얘기잖아요. 일부러 물러서서 지켜보고, 유머를 가미하는 형식을 취했죠.”

그는 “이건 분명 현대 젊은이들의 얘긴데, 영화를 먼저 본 어머니께서 자신이 느낀 감정과 비슷하다고 하셔서 흥미로웠다”고 했다. 주인공과 비슷한 젊은 여성이 아니라도 인물들의 당혹감과 막막함을 한번쯤은 헤아릴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캐릭터를 빚었다. “어떤 딜레마에 처한 인물을 보면 우린 ‘그러게 왜 그랬어’같은 판단을 하게 돼요. 그런 식으로 판단을 계속하면 타인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에게 ‘그냥 낳으면 되지, 지우면 되지’ 판단하지 않고 ‘내가 이 경험을 한다면 어떤 마음일까’란 태도로 영화를 봐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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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선 동문 작품 '십개월의 미래' 포스터. 


“돌이켜보면 내 관심사는 늘 현실 속 인간이었다”는 남궁 동문. 건축과 영화는 “현실적 제약 안에서 뭔가를 만든단 점에서 비슷하다”면서도 공간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건축보다, 불완전한 인간사를 들여다보는 영화에 더 이끌렸다고 했다. “대학 시절 쓰던 건축 프로그램에 건물을 렌더링하고 카메라 무빙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요. 친구들이 건물에 집중할 때, 전 이상하게 그 안에 동아리방을 만들고, 사람들이 거기 앉아 짜장면 먹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더라고요. ‘영화와 역사’ 수업을 들은 것도 영향을 줬죠. 건축은 제 언어가 아니었지만 공부를 하면서 얻은 수많은 불면의 밤과 체력, 발표하고 크리틱(비평)하고 설득하는 능력, 그리고 미학적인 것과 구조적인 것을 아울러 공부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하고, 도와준 친구들을 얻을 수 있어 좋았어요.”  

영화학도 시절 찍은 단편 ‘세상의 끝’이 세계적인 학생영화제에서 수상했고, 단편 ‘최악의 친구들’이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비정성시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배우 김수현, 박정민, 정소민 등 재목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작중 캐릭터에 탁월하게 매치시킨 덕에 배우 팬들은 그의 작품을 순례하듯 찾아본다.  

작품마다 엔딩 크레딧의 ‘고마운 사람들’에 그의 가족과 건축학과 동기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아버지 남궁근(정치72-76 전 서울과기대 총장) 동문을 비롯해 어머니와 동생들까지 서울대 동문 가족. 남다른 길 걸은 덕에 걱정과 애정을 한몸에 받았다. “아버지께서 지금 있는 곳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나아가라, 하고 싶은 건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게 역설적으로 원하시지 않는 길을 고집하게 된 동력이 된 것 같아요. 영화가 불안정한 일이라 한숨도 많이 쉬셨죠. 그래서 어떤 성취라도 가족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자랑하려 노력합니다(웃음).” 

인터뷰 며칠 뒤 열린 첫 시사회에서 남궁 동문은 조금 떨려 보이는 모습으로 ‘재난영화로도, 성장영화로도 느껴질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영화를 본 후, 기자와 동행한 친구는 각자 생각에 잠겨 말없이 극장을 나섰다. 침묵을 깬 것은 몇 시간 후 ‘자꾸 생각난다’며 날아온 메시지. ‘잘한 걸까, 잘못한 걸까. 나였다면….’ 한 번 물꼬를 튼 영화 얘기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문득, ‘성공한 영화’란 무엇인 것 같냐는 물음에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준비 중인 시놉시스만 10개가 넘는다’는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게 될 메시지다. 

“제가 생각하는 성공한 영화는, 관객이 정말 여행을 한 것 같은 느낌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영화예요. 관객이 자기 바깥 세상을 읽고, 내 감정의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