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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2020년 10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선수’들과 겨뤄 팬텀싱어 3위…“도전하는 과정이 짜릿”

4중창단 ‘레떼아모르’ 리더 길병민 동문



‘선수’들과 겨뤄 팬텀싱어 3위…“도전하는 과정이 짜릿”

4중창단 ‘레떼아모르’ 리더
길병민 동문


최근 데뷔 앨범 ‘꽃 때’ 발매
서울·부산·고양 순회공연도





“과거의 성적이 평생의 나를 규정지을 순 없습니다. 결과보단 도전하는 과정 자체에 더 큰 의미가 있어요. 끊임없이 제 노래를 갈고닦아 유일무이, 대체 불가능한 성악가로 거듭나겠습니다.”

오페라 가수 길병민(성악13-17) 동문은 최근 종영한 JTBC ‘팬텀싱어3’에 출연, 4중창단 ‘레떼아모르’를 이끌어 3위에 입상했다. 팬텀싱어는 성악, 국악, 뮤지컬, K팝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실력파 보컬리스트를 총망라하는 크로스오버 오디션 프로그램. 정상에 오르지 못한 자의 결기 어린 다짐 같지만, 길 동문은 이미 세계의 주목을 받는 신예 성악가다.

동아 음악 콩쿠르 등 권위 있는 국내 대회의 우승을 휩쓸었고, 2016년 프랑스 똘루즈 국제성악콩쿠르 최연소 베이스 우승, 2017년 모나코 몬테카를로 국제성악콩쿠르와 비엔나 옷토에델만 콩쿠르 우승, 2018년 오페라 크라운 국제성악콩쿠르 초대 우승 등 굵직굵직한 수상 이력만 나열해도 숨이 찰 지경이다. 3위로는 성에 안 찰 듯한데 “감사한 결과”라고 말하는 그를 지난 9월 24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국내외 성악콩쿠르 우승은 제게도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저는 타고난 사람은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해준 가족과 친구들, 동료들 덕분에 성장해왔어요. 전 세계 대회 일정을 검색해 몇 년 치 플랜을 짰습니다. 수많은 콩쿠르에 참가하면서 직접 보고,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이 많아요. 그중 하나가 입상은 무대에서 보여준 역량뿐 아니라 향후 발전 가능성과 해당 콩쿠르가 추구하는 상품성까지 종합 평가된 결과라는 점이었죠. 이런 다양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끊임없이 연습했습니다. 조금씩 무르익기 시작했을 때 좋은 성적이 나오더군요. 스무 살 때 뜻을 세워 10년 후쯤 성과를 낼 것으로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빛을 보게 됐어요.”

길 동문은 2019년 8월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선발돼 활동하다가 팬텀싱어 출연을 결심하면서 사표를 냈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영국 최고의 오페라 극장으로 조수미, 연광철, 이용훈, 김정훈 등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앞서 활약한 꿈의 무대. 언어, 연기, 문화, 인터뷰 스킬까지 톱스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역량을 집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곳이다. 오페라와 클래식의 가치를 잘 아는 그였기에 로열 오페라 하우스를 나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저는 노래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엄마의 자장가를 들을 때, 아빠가 흥겹게 부르는 노래를 들을 때 행복했고, 자연스럽게 음악을 선택하게 됐어요. 음악이 좋아 예술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성악을 전공하기 시작하자 소속집단의 강요가 생겨났습니다. 너는 성악만 해야지, 클래식만 해야지 하는. 음악은 국한돼 있지 않은데 그런 음악을 깊이 공부하려니까 특정 장르에 갇히게 되더군요. 그러나 삶이 그런 것처럼 노래도 무한한 확장이자 크로스오버라고 생각해요. 장르를 초월한 노래꾼이 되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의 열정이 국경을 뛰어넘은 걸까.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길 동문이 나간 문을 열어뒀다. 최선을 다하고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이 사표 내고 뛰쳐나간 단원의 적을 걸어둔 것이다.

화려한 수상 이력과 준수한 외모. 모든 걸 다 가진 귀공자처럼 보이지만, 길 동문이 버티고 일어선 역경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모교 입학과 동시에 독립해 제 손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고,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학교 연습실에 처박혀 노래했다. 늦은 밤, 경비 아저씨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학생 안 가요?” 할 때 스스로 대견해져 힘이 났다고.

“녹두거리 같은 데 놀러 다닌 추억은 별로 없어요. 왜 같이 어울리지 않느냐며 야속해 하는 동기들에게 서울대 성악과 들어와서 게을러지면 이 자리 떨어진 누군가가 얼마나 분하겠느냐며 열심히 살자고 독려했죠. 함께 연습했던 동기들 모두 힘든 과정을 잘 이겨냈고 지금은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냈습니다. 만나면 서로를 흐뭇하게 보게 돼요.”

길 동문은 모교를 ‘귀감이 되는 존재들이 도처에 널린 곳’으로 회상했다.

“1학년 때 ‘기초’ 독일어 수업을 듣는데 수강생 대다수가 ‘기초’가 아니었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도 늘었고 시험에서도 몇 문제 안 틀렸는데 중간고사 성적이 뒤에서 2등이었습니다. 교수님께 항의했더니 ‘잘했는데 다들 만점이라…’ 하는 답을 들었어요. ‘과연 서울대구나’ 생각했죠. 스터디그룹을 짜서 같이 공부했던 타 전공 선배들에게 ‘어쩜 이렇게 경쟁심이 없고, 대가 없이 다 가르쳐 주느냐’ 물었습니다. ‘즐겁고 좋으니까. 넌 네 전공에서 그렇게 할 거 아냐. 우린 너처럼 무대에 못 서. 그리고 너처럼 노래 못 해’라고 답하더군요. 그때 명함 내미는 데 부끄러운 사람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팬텀싱어 출연을 계기로 더 널리 이름을 알린 길병민 동문은 지난 10월 6일 데뷔 음반 ‘꽃 때(A Time to Blossom)’를 발매했다. 한국 가곡 100주년을 맞이해 우리말로 쓰인 창작 가곡에 집중한 이번 앨범은 성악가로서 그의 정체성을 깊이 있게 표현하는 동시에 관객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10월 27일엔 서울, 11월 10일과 12일엔 부산과 고양에서 ‘베이스 바리톤 길병민 리사이틀’을 개최한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