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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호 2019년 5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버려진 노년에 바친 헌사' 최일남 동문 '국화 밑에서' 수상작 평

정병설 인문대학 문학상 운영위원


버려진 노년에 바친 헌사



정병설
국문84-88 모교 국문과 교수·문학상 운영위원


도서 불황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무려 100만 부를 판매한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과 이번 수상작 ‘국화 밑에서’의 작가 최일남은 딱 반 백년의 나이 차이가 있다. 가부장 사회에서 성차별의 질곡을 견뎌온 아직은 젊은 김지영의 삶은 도작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지만, 최일남이 그린 노년의 삶은 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람이면 누구나 겪게 될 노년이건만 스스로도 곱게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노년이다.

물론 노년이라고 다 같은 모습은 아니다. 작품 내에서도 언급된 ‘분노하라’의 작가 스테판 에셀은 9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그냥 두고 보지 말고 분노하라고 외쳤다. 또 104세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화가 김병기가 있어서 노년이 의미 있는 삶의 끝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개의 노년은 무기력하게 무의미한 일상을 되풀이하여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를 밟아간다. 사회에서는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노인은 가정과 사회의 짐으로 취급된다.

최일남의 ‘국화 밑에서’는 버려진 노년에 바친 헌사다. 80세를 넘긴 작가는 동년배 삶의 다양한 국면을 그려냈는데, 그것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기억, 소외, 죽음이다. 죽음을 마주한 노인이 지나간 시간을 쓸쓸히 회고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책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는 일이 많다. 인물들이 책을 인용하여 말하고 그것을 대화의 주소재로 삼는 것이다. 노인에게 흘러간 경험은 너무 많이 길어 올린 샘물과 같아서 더 나올 것이 없다. 또 사회와 단절된 지 오래니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도 어두워 별로 할 말도 없다. 오로지 독서 체험만이 낡은 기억을 다시 새롭게 건져 올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노년의 추억법이다.

이 작품은 노년을 향해가는 독자들에게 앞질러 미래를 보게 한다. 그러나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일찌감치 노년을 준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니, 결국 이 책은 잘 읽히지 않을 것이다. 노년을 함께 지나가는 수많은 노인들 역시 잘 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향해가는 자신의 초라함을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초고령 사회로 들어가는 우리 사회의 현실 이면을 앞질러 보여준 선구적인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노년을 그린 낡은 소설이 아니라 미래를 그린 젊고 신선한 작품이다.

“권태에 볼모 잡혀 생으로 시간을 앓는 축에겐 하루하루가 때로 지겹다. 구복을 채우고 남는 여백에 무엇을 담을까 시달리는 모양이 남의 눈에는 유유자적으로 비칠 공산이 크려니와, 당자에겐 고통인 수가 많다.” (‘밤에 줍는 이야기 꽃’ 중-국화 밑에서에 수록된 7편 단편 가운데 한 편)


▽ “문학적 꼰대란 소리 듣지 않겠다” 제1회 서울대 인문대학 문학상 최일남 소설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