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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호 2025년 7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조성진 리사이틀에서 만난 조율이라는 예술



김수현 (경영90)
SBS 보도본부 부국장
본지 논설위원
2025년 6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라벨 피아노 솔로 전곡 연주회가 열렸다. 인터미션 두 번에 연주 시간 3시간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거울(Miroirs)’과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 같은 난곡으로 가득한 프로그램이었다. 다른 작곡가의 곡도 탁월하게 연주하지만, 조성진은 특히 라벨을 연주할 때 ‘펄펄 난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생생하게 빛났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와 ‘물의 유희’ 등이 연주된 1부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1부 연주를 마친 조성진이 뜨거운 박수 속에 퇴장하고 첫 번째 인터미션이 시작됐다.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하느라 웅성대는 가운데 무대에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예술의전당에 상주하는 ‘대한민국 조율 명장 1호’ 이종열 선생이었다. 조율사는 대개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조용히 콘서트홀 피아노를 점검하고 물러나기에, 관객이 그 존재를 인식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조율 도구를 들고 무대에 등장한 그는 피아노 앞에서 수없이 건반을 눌러보며 음정을 다시 조정했다. 인터미션이 끝날 무렵 그가 도구를 정리하고 퇴장하자 곧 2부 연주가 시작됐다. 2부 연주가 끝나고 이어진 두 번째 인터미션에도 그는 어김없이 무대에 올랐다. 인터미션은 연주자도, 관객도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지만, 이종열 선생에게는 바쁜 작업의 시간이었다.
공연이 시작된 후에도 필요에 따라 조율사가 피아노를 조율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조성진은 이번 공연에서 인터미션마다 피아노를 점검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특별한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공연장 온도 변화에 따라 음정이 미세하게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콘서트홀에서는 여름철에는 관객 입장 전에 아주 강하게 냉방을 가동해 실내 온도를 크게 낮춰 놨다가 공연 때는 소음을 줄이기 위해 끈다.
관객이 입장하면 실내 온도는 다시 올라간다. 나무와 금속 현으로 만들어진 피아노는 온도 습도 변화에 민감하다. 강력한 냉방 상태에서 조율된 피아노는 공연이 시작되면 미세한 변화를 겪는다. 또 피아니스트의 열정적인 타건이 이뤄진 후의 피아노는 처음 조율된 상태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터미션 때마다 조율 명장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했던 이유다.
올해 87세인 이종열 선생은 피아노 조율사로 살아온 세월이 70년 가까이 된다.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예술의전당에서만 30년째 음악당 피아노를 전담해 조율하고 있다. 2007년 국내 주요 공연장의 조율사들은 대부분 그의 제자들이다. 조율도 예술이라고 믿는 그는 “피아노 조율사는 소리로 조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2020년 이종열 선생이 자신의 조율 인생을 담은 책 ‘조율의 시간’을 펴냈을 때, 그의 ‘작업 현장’을 직접 취재한 적이 있다. 마침 조성진이 연주하는 공연이 열릴 때였다. 조성진이 연주할 피아노를 미리 조율해 놓았다가, 이 피아노로 리허설을 마친 조성진의 요청에 따라 다시 조율하는 모습을 보았다. 조성진은 “선생님이 조율해 주시면 음에서 빛이 나는 느낌이 든다”며 조율사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피아노 조율사는 피아니스트한테 굉장히 중요한 분들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아예 연주를 망치게 할 수도 있고, 더 좋아지게 할 수도 있는 게 조율사의 역할이고 힘인데, 이 선생님처럼 좋은 조율사가 한국에 있어서 너무 기쁘고 감사해요.”
조성진은 이날, 이종열 선생이 조율한 피아노 위에서, 3시간에 이르는 라벨 ‘대장정’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놀라운 집중력으로 완주했다. 음량과 음색의 컨트롤은 탁월했고, 마치 춤추듯 리듬을 타는 모습에서는 여유마저 느껴졌다. 오랫동안 기억될 만한 ‘기념비적인’ 연주였다.
이날의 명연주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인터미션마다 무대에 올라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던 이종열 선생의 모습도 함께 떠올릴 것 같다. 라벨의 피아노 예술을 오롯이 펼쳐낸 조성진의 명연주 뒤에는 ‘조율이라는 이름의 예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