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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호 2024년 4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죄짓고도 유야무야됐던 국제범죄의 악습, 더는 반복되지 않을 겁니다”

 
“죄짓고도 유야무야됐던 국제범죄의 악습, 더는 반복되지 않을 겁니다”
 
백기봉 (사법83-87)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한국인 세번째 국제형사재판관에
“꾸준히 공부하니 새로운 길 열려”


“1989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 들어가기 전 겨울,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었습니다. 35박 36일 일정 막바지에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했어요. 현재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이하 ICC)가 있는 곳이자 당시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이하 ICJ)가 있었던 곳이죠. 헤이그는 전 세계를 통틀어 국제법의 수도라 할 수 있는, 국제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곳입니다. 저 또한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던 중이어서 언제고 여기서 일하리라는 치기 어린 다짐을 하고 돌아왔었죠.”

35년 전 백기봉 동문의 다짐은 현실이 됐다. 작년 12월 ICC 재판관에 당선, 지난 3월 8일 임기를 시작한 것. 사법연수원 21기 수료 후 검찰에서 22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10년 근무하는 동안 ‘ICC 소추관의 독립성 연구’로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석사학위를, ‘ICC 증거법에 관한 연구’로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ICC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범자 처벌이나 반인도적 범죄 처벌을 위해 있었던 임시 재판소들을 뛰어넘어 상설 재판소를 만들자는, 1998년 채택된 로마 규정에 따라 2002년 설립된 국제기구. 우리나라는 2000년 로마 규정에 서명하고 2002년 비준한 83번째 가입국이다. 백 동문은 법무부에서 로마 규정의 국회 비준 동의를 위한 준비 업무를 담당했고, 로마 규정 개정을 위해 2010년 우간다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도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송상현(법학59-63) 재판소장과 정창호(사법85-89) 재판관에 이은 세 번째 한국인 ICC 재판관이지만, 우리나라의 조기 가입을 추진함으로써 일찍이 한국인 ICC 재판관이 배출될 수 있게 기반을 닦은 셈. 작년 12월 선거에서 123개 회원국 중 82개국의 표를 얻었고, ICC 재판관 후보자 심사 자문위원회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매우 우수(highly qualified)’를 받았다. 오는 8월 헤이그로 부임하는 백기봉 동문을 3월 27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만났다.

“국가 간 분쟁을 다루는 ICJ와 달리 ICC는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침략범죄 등 4대 중범죄를 저지른 고위 책임자 개인을 처벌합니다. 수사 및 소추를 담당하는 소추부와 재판부, 사무국 등으로 구성되죠. 재판부는 다시 소추부가 신청한 체포영장, 공소장 등을 심사하고 1심 재판에 회부할지 여부를 판단하는 전심 재판부와, 증인 및 피해자를 불러 본격적으로 공방을 벌이는 1심 재판부, 그리고 항소심 재판부로 구분됩니다. 저는 총 18명의 재판관 중 다른 6명과 함께 1심 재판부를 맡게 됐어요.”

ICC는 단일 국가 내 사법기관이 아닌 만큼 회원국은 물론 비회원국과의 협조가 중요하다. 체포영장을 발부해도 가서 잡아 오는 인력은 따로 없는 상황. 최대 30년, 극단적일 경우 무기징역을 선고하지만, 형 집행을 위한 시설도 헤이그에는 없다. 피의자를 구속, 압송하는 것도, 선고 후 죄인에 대한 형 집행을 하는 것도 회원국의 몫이다.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말리 같은 아프리카 국가 피의자가 주로 단죄돼 오다가, 최근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군 장성에게도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개 회원국의 요구에 따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범죄 조사에 착수했다.

“중대하고 심각한 국제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상황을 법적으로 제거하는 게 ICC의 목표입니다. 정권을 찬탈하거나 국가 혼란 상태가 계속되면 죄를 짓고도 유야무야됐던 악습이 더는 반복되지 않을 겁니다. ICC가 당장 피의자를 체포하긴 어려워도 4대 중범죄를 저지르면 언젠간 반드시 기소되어 처벌될 것이란 인식을 심어주고 있어요. 한번 발부한 체포영장은 피의자가 죽을 때까지 유효하거든요. 공소시효도 없고요. 강력한 경고 메시지로서 범죄 예방 효과도 기대되죠. 회원국 간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긴 시간 추적이 계속돼, 결국 제 발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ICC의 또 다른 주요 목표는 피해자의 권리보장과 피해 배상. 유죄가 확정된 피고인에겐 배상 명령이 내려지는데, 피고인에게 재산이 별로 없거나, 있어도 찾기 어려운 경우를 대비해 ‘트러스트 펀드’라는 기금을 마련해뒀다. 금전적 배상은 물론 피해 지역에 병원이나 학교를 지어주는 등 다양한 형태의 배상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또한 ‘피해자 참가 제도’를 도입, 변호인을 통해 재판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과 권리를 법정에서 주장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ICC에 기소될 만한 사람이라면 인류의 공분을 산, 분명 죄인일 텐데 재판이 꼭 필요할까? 백 동문은 “국가지도자급 피의자를 다루는 형사 사건이기에 그가 지시했는지, 공모했는지, 알고 있었는지 등을 증인 진술과 물적 증거로 명확히 입증하는 게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답했다. 또한 ICC 안엔 국선 변호인 같은 역할을 하는 부서도 있다고. 사실에 입각한 범죄 소명과 함께 죄를 지어도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지, 일방적인 처분이 이뤄져선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검사와 변호사, 상반된 두 입장에서 오래 근무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ICC 재판 과정을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해 국제인도법 정의와 국제 평화를 실현하는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사실 사소한 관심으로 시작한 국제법 공부였어요. 검사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주말에 대학원 수업 듣고 논문 쓰는 시간이 일종의 기분 전환이 됐죠. 꾸준히 공부했고 기회 닿을 때마다 관련 업무를 맡아 했던 게 멀고 높게만 보였던 ICC 재판관의 꿈을 이루게 해줬습니다. 젊은 동문들에게 자기 관심 분야를 놓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직업에 매여 있다 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면, 운 좋게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고, 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좋은 취미가 될 테니까요.”                                               


나경태 기자